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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과정

전개과정
4.19혁명전개과정을 안내합니다.

대구 2·28민주운동

대구 2·28민주운동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의 대구 유세가 2월 28일 수성천변에 예정되자 전국적으로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승만 자유당 정부는 대구시민의 유세장 집결을 막고자 일요일인데도 시험, 영화관람, 토끼사냥 핑계를 대며 대구지역 중·고등학생들을 등교하도록 강제했다. 경북고등학교를 비롯한 8개 고교의 분노한 학생들은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고 요구하면서 거리로 뛰쳐나와 대구 시내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28민주운동은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었다.

대전 3·8민주의거

대전 3·8민주의거

자유당 정권의 부정과 부패에 맞선 대전지역 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돼 1960년 3월 8일부터 10일까지 민주적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대전고등학교 학생들은 8일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으며, 대전지역 고교 학생대표들을 강제 연행하고 구속하는 경찰의 탄압에도 10일 대전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는 대전·충청권 최초의 학생운동이며 대구 2·28민주운동, 마산 3·15의거와 함께 4·19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

3·15부정선거

3·15부정선거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되자 이승만 정권은 12년간 계속된 장기집권을 연장하려고 미리 선거 조작을 획책하였다. 야당의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떠나자 선거일을 2개월이나 앞당겼고, 조병옥 후보가 미국에서 갑자기 사망하자 이승만의 4선 당선이 확실하게 되었다.

그러자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켜 당시 86세 고령이던 이승만 대통령이 사망하면 권력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공무원을 총동원하는 부정선거를 기획했다. 선거운동망을 조직하고 선거에 경찰조직을 활용하는 등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1. 4할(40%) 사전투표 및 투표함 바꿔치기
  2. 유권자 명부 조작 및 대리투표
  3. 득표수 조작 및 3인조, 5인조 공개투표
  4. 야당 참관인 축출
  5. 자유당 완장부대와 깡패를 동원하여 유권자 위협

개표 과정에서 이기붕 부통령 후보의 표가 100% 가까이 나오자 내무부 장관이 득표수를 줄여서 발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부정선거 결과, 대통령 이승만 963만표(85%), 부통령 이기붕 833만표(73%)로 당선됐다.

마산 3·15의거 (마산 1차 시위)

마산 3·15의거 (마산 1차 시위)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장기집권하려고 획책한 3·15부정선거로 수많은 국민들이 격노하였다. 마산시민과 학생들은 3월 15일 오후 부정선거를 폭로하고 선거무효를 외치며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를 강제 해산시키려고 경찰이 시민을 향해 발포했고 사망 7명(김삼웅, 김용실, 김영준, 김영호, 김효덕, 오성원, 전의규), 중상 1명(강융기, 병원에서 4월 10일 사망), 실종 1명(김주열)의 희생자가 나왔다. 또 250여명이 부상 당하거나 구속되는 등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이 계속됐다.

4.11. (마산 2차 시위)

4.11. (마산 2차 시위)

당시 이승만 정권은 공산당이 마산 시위를 사주했다고 억지를 부렸다. 그러다 시위 중 행방불명된 16세 김주열의 시신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격분한 시민들은 경찰의 만행과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2차 시위를 벌였다. 그 와중에 경찰이 쏜 총탄에 1명(김영길)이 사망하고 수십여명이 부상을 입자 시위는 더욱 대규모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마산시민과 학생들의 정의로운 투쟁은 전국으로 확산돼 4·19혁명으로 이어졌고, 4월 26일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이 과정에서 마산에서는 2명(김종술, 김평도)이 더 희생되었다. 3·15의거는 대한민국 최초의 유혈 민주화 운동이었다.

4·18고대의거 및 피습

4.11. (마산 2차 시위)

1960년 4월 18일 3000여명의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기성세대는 반성하라” “마산 사건의 책임자를 즉각 처단하라”는 선언문을 낭독한 후 ‘민주역적 몰아내자’ ‘자유·정의·진리 드높이자’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국회 앞까지 진출하여 평화적인 연좌시위를 하였다. 시위 중 연행되었던 학생들이 풀려나자 학교로 돌아가는 대열에 수많은 시민과 중·고교생이 뒤따랐다. 그러나 학교로 돌아가던 학생들을 노리고 정치깡패 ‘반공청년단’이 흉기를 휘두르며 습격했고 200여명의 학생들이 부상 당하는 피습사건이 발생했다. 학생피습 사실이 다음날 신문에 보도되자 분노한 시민과 중·고·대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고 전국에서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4·19혁명이 시작되었다.

4·19혁명 (피의 화요일)

4·19혁명 (피의 화요일) 1 4·19혁명 (피의 화요일) 2

마침내 4월 19일, 수많은 대학생, 중·고등학생, 시민들이 “부정선거 다시 하라! 독재정권 물러가라!”고 외치며 광화문, 종로 등 서울 시내 곳곳을 누볐다. 시위대는 10만명을 넘어섰고,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향했다. 대규모 시위대가 경무대 앞에 이르자 경찰이 집단 발포하기 시작하여 21명의 희생자와 172명의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승만 정부의 강경 대응에도 시위가 인천, 수원, 부산, 광주 등 전국으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이승만 정권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날 전국적으로 시위대와 경찰 등 115명이 사망하고 727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유혈사고 책임을 지고 국무위원과 부통령이 사표를 냈고,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는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 총재직만 사퇴하겠다며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4.25. 교수단 시위

4.25. 교수단 시위

이승만 정권의 미온적인 태도에 국민들은 다시 분노하였다. 전국 27개 대학 교수단 258명은 종로에서 시위를 벌이며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국선언문을 채택하였다. “학생 시위는 정의감과 민족정기의 발로이며, 대통령, 국회의원, 대법관 등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고 요구하였다. 교수단 시위에 힘을 얻은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는 밤새 계속되었으나 경찰과 계엄군은 시위대를 저지하지 않았다. 교수단 시위는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던 4·19혁명에 결정적이고도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4.26. 이승만 대통령 하야 (승리의 화요일)

4.26. 이승만 대통령 하야 (승리의 화요일) 1 4.26. 이승만 대통령 하야 (승리의 화요일) 2

시위대는 4월 25일부터 이승만 정권의 퇴진과 대통령 하야를 강력하게 요구했고,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렸다. 계엄사령관 송요찬 장군은 학생들의 요구가 정당하다고 인정하고, 계엄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지시하였다. 국회는 ‘대통령의 즉각 하야, 정·부통령 재선거, 내각 책임제 개헌’ 등을 결의했다. 미국 대사와 일부 각료가 거듭 하야를 설득하자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은 26일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는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부정선거와 장기집권을 꾀한 자유당 정권은 무너졌고, 자유·민주·정의를 외치며 불의에 항거한 ‘피의 화요일’의 숭고한 희생은 ‘승리의 화요일’로 승화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출발을 역사에 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