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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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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가네코 후미코, 후세 다쓰지 선생 공적내용
부서 공훈관리과
□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일본인임에도 일제에 맞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한국을 사랑한 독립유공자 가네코 후미코·후세 다쓰지 선생을 2023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 1903년 요코하마에서 태어난 선생은 1912년부터 7년간 충청북도 청주군 부용면 부강리(현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부강리)의 고모부 집안에서 성장하였다. 고리대금업과 아편 밀매로 조선 농민들을 착취하는 고모부 가족 밑에서 가정학대를 받은 선생은 비슷한 처지에 있던 식민지 조선인들에 대해 깊은 이해와 공감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 제국의 무단통치에 대한 반감, 권력에 대한 선생의 저항의식은 1919년 3월 부강지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한 것을 계기로 더욱 커졌다.

ㅇ일본 도쿄로 돌아와 식당 종업원 등으로 고학(苦學)하던 중 1922년 5월 흑도회(黑濤會)에서 의열활동을 펼치고 있던 박열을 만났다. 박열과 함께 1922년 7월 흑도회 기관지 ≪흑도(黑濤)≫를 창간했고, 노동자 후원과 친일파 응징 등 항일활동을 펼쳤다. 또 민중의 직접행동 노선을 추구하는 고학생들과 함께 사상단체 흑우회와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해 한인 노동자 학살문제 등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ㅇ선생의 활동은 박열의 항일 의열투쟁과 관련이 깊다. 박열은 1922년 2월 중국 의열단에서 파견된 최혁진을 만나 조선총독부와 도쿄 왕궁을 동시에 파괴하려는 의열단의 대규모 계획(일명‘제3차 폭동계획’)에 의해 폭탄을 받기로 하였다. 

ㅇ1923년 1월 김상옥 투탄 의거로 국내 폭탄 수취 책임자인 김한이 체포되고 일제의 경계망이 삼엄해지면서 계획은 일시 중단되었으나, 박열은 다른 방법을 통해 의열단의 폭탄을 입수하고자 하였다. 결국 불령사 동지인 최영환을 통해 중국 상해의 의열단체와 폭탄구입을 협의해 인계받았다. 

ㅇ1923년 9월 1일 돌연 도쿄 일대에 대지진(관동대지진)이 발생했다. 일제의 요주의(要注意) 인물이던 박열은 9월 2일 경찰에 체포되었고, 선생은 3일 밤 계엄군에 의해 연행되었다. 세타가야(世田谷)경찰서에는 보호 검속이란 명목으로 연행된 두 사람 이외에도 불령사 회원 전원과 120여 명의 한인이 수감되었다. 

ㅇ일본 경찰은 두 사람을‘비밀결사의 금지’ 위반을 들어 불령사 16명과 함께 치안유지법으로 기소했다. 검찰 조사과정에서 박열의 폭탄 구입 계획이 드러나자, 일제는 불령사 회원들에게‘대역사건(大逆事件, 천황 또는 국가의 전복을 기도하며 벌이는 대규모 반역사건)’의 혐의를 씌워 폭발물 취체법으로 기소했으나, 폭탄 투척계획은 아무런 물증이 없었기에 선생·박열·김중한만 기소되었고, 나머지 불령사 회원들은 모두 무죄로 석방됐다. 

ㅇ선생과 박열은 조선인 대학살에 대한 비난을 모면하려는 일본 정부에게 목숨을 구걸하기보다는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투쟁을 벌였다. 일제의 수많은 회유에도 불구하고 전향을 거부한 채 예심판사에게 폭탄유입 계획을 당당히 밝혔다. 1926년 2월 26일 도쿄 대심원 법정에서 열린 공판에서 선생은 조선 치마저고리를 입고 출정해 자신을 ‘박문자’라고 밝혔다. 또한 박열과 함께 사형을 선고해 달라며 의연한 태도를 보였고, 사형 판결 즉시 만세를 외쳤다. 

ㅇ일본 검찰은 10일 만에 두 사람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켜달라는 은사(恩赦, 사면)를 신청했고, 곧 사면장이 발행되었다. 선생은 일본 정부의 기만 술책에 저항하며 형무소장 앞에서 사면장을 찢어버렸다. 사형 판결 이후 선생은 교도소에서 편지 교환은 물론 외부와도 단절되었고, 글 쓰는 것도 금지되자 단식 농성을 벌이며 저항하였다. 

ㅇ1926년 7월 23일 아침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교도소 측은 선생의 시신을 서둘러 인근 들판에 가매장(假埋葬) 했다. 이에 원심창 등 흑우회 동지들이 교도소로 몰려가 유해를 발굴한 후 유골을 수습해 후세 다쓰지 변호사에게 맡겼고, 이후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 팔령산에 묻었다. 

ㅇ사후인 1931년 자전적 옥중 수기인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가 발행되어 선생의 굴곡진 삶이 세상에 드러났고, 1973년 아나키스트 동지들이 선생의 묘소를 정비해 묘비를 세워  주었다. 2003년 12월 박열의사기념공원이 조성됨에 따라, 유해는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 44번지 기념관 앞으로 이장하게 되었다. 


□ 후세 다쓰지 선생은 1879년 일본 오시카군(牧鹿郡)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서당에 다녔는데, 제자백가 중에서도 전쟁에 반대하고 타인을 사랑한 겸애주의자인 묵자(墨子)를 존경했다고 한다. 자유민권운동 지지자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인간의 평등성을 바탕으로 일찍이 차별과 억압에 눈 뜬 것으로 보인다.

ㅇ1899년 도쿄에 상경해 메이지법률학교(明治法律學校)에 입학하여 기독교인과 사회주의자는 물론 조선인을 비롯한 아시아 유학생들과 많이 교류했다. 이러한 경험은 후일 그의 활동영역이 일본을 넘어 조선과 대만·중국 등 식민지까지 확장되는 기반이 되었고 피지배 민중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배경이 되었다. 

ㅇ1903년 사법 시보를 사임하고 변호사가 된 선생은 일제의 조선 침략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을 비판하며 1911년에는「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을 써서 검사국으로부터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19년 3·1만세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본격적으로 조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ㅇ선생이 처음으로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만난 사건은 1919년 2·8 독립선언으로 체포된 최팔용(崔八鏞)·백관수(白寬洙) 등 9명에 대한‘출판법 위반사건’이었다. 변호인으로서 한국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옹호하였고 이를 계기로 조선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정을 느껴 변호와 많은 도움을 주었다. 

ㅇ1923년 7월 처음으로 조선을 방문해‘인간생활의 개조운동과 조선민족의 사명’이란 주제의 강연회를 가졌고, 열정적인 강연에 많은 조선인들이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귀국 후 얼마 뒤 관동대지진이 일어났고, 대규모 조선인 학살이 발생했다. 그는 자유법조단의 일원으로 사건을 조사하고 학살이 책임이 일본 정부와 군부, 경찰과 자경단에 있음을 밝히려 했지만, 일본 당국의 방해로 조사결과를 발표할 수 없었다. 

ㅇ선생은 조선인대학살에 대한 비난을 모면하려는 일본 정부에 의해 ‘대역사범’의 누명을 쓰고 법정투쟁을 벌이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선생에 대한 변론을 맡았다. 변론과정에서 옥사하여 형무소 뒤뜰에 버려진 가네코 후미코 선생의 유해를 원심창 등 흑우회 동지들로부터 거두어 자신의 집에 안치했다가 박열의 고향으로 운구해 묻히게 하였다.

ㅇ이후 선생은 1926년 전남 나주군 농민들의 토지반환 투쟁, 1927년 조선공산당사건, 1931년에는 김한경의 치안유지법 사건 재판등 조선 독립을 위한 애국지사들을 지속적으로 변호하면서 조선인, 일본인 구분 없이 민중과 함께한다는 자신의 소신을 관철시켜 나갔다. 

ㅇ1932년 법정 모독이라는 이유로 징계재판에 회부되어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고, 1933년에는 신문지법, 우편법 위반으로 기소당하여 금고 3개월의 실형을 선고받다.

ㅇ선생은 태평양전쟁이 끝난 이후 자유법조단을 다시 결성해 변호사로 활동했다. 새로운 평화헌법 보급과 계몽에 힘쓰고 재일조선인의 권리를 획득하는 투쟁에 매진하였다. 이후에도 활발하게 민권운동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다 1953년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는 수 많은 한국인들이 장의위원으로 참여해 선생의 명복을 빌었다. 

□가네코 후미코·후세 다쓰지 선생은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위대한 독립운동가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가네코 후미코 선생은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후세 다쓰지 선생에게는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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