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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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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우리고장 출신 독립운동가
부서 보훈과
자랑스런 우리고장 출신 8월의 독립운동가 『황만우(黃滿宇) 선생』주요공적 (1901. 8. 30 ∼ 1952. 11. 29) 양산 동면 출신인 선생은 1919년 동래 3·1운동을 주도하신 분으로 탄신 102주기를 맞이하여 자랑스런 우리고장(울산·양산) 출신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으며, 주요공적은 다음과 같다. 양산 동면에서 1901년 8월 30일 출생한 선생은 1919년 3월 18일 범어사에서 있었던 학생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당시 범어사에는 초등학교 과정의 명정학교(明正學校)와 중등학교 과정의 지방학림(地方學林)이 있었는데, 선생은 지방학림 학생이었다. 3월 17일 오후, 범어사 경내에서는 40여 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명정학교와 지방학림 학생들의 졸업생 송별회가 열렸다. 송별회 직후 김영규의 선창으로 40여명의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튿날 새벽 1시경 동래읍 복천동에 있는 불교포교당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곳을 기습한 20여 명의 일경에 의해 피체되었고 나머지는 강제 해산당하였다. 강제해산 당한 학생들은 다시 의거를 모의하고, 학생 40여명은 3월 18일 밤, 동래읍 서문 부근에서부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동래시장을 거쳐 남문에 이르기까지 시위운동을 전개하고 해산하였다. 그 날 밤 다시 비밀회의를 갖고 19일에는 더욱 큰 의거를 단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19일 오후 5시경, 황만우 등 10여 명의 학생들은 동래시장 남문 부근에서 시위를 전개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연이어 고창하면서 동래경찰서로 돌진하였다. 이 때 선생은 일경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고 여러 주도 인물들과 함께 피체되었으며, 4월 2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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