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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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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우리고장 독립운동가
부서 보훈과
자랑스런 우리고장 출신 4월의 독립운동가 『최금석(崔金碩) 선생』주요공적 (1897. 12. 12 ∼ 1979. 1. 11) 중구 남외동 출신인 선생은 1919년 4월 병영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신 분으로 의거 84주년을 맞이하여 자랑스런 우리고장(울산·양산) 출신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으며, 주요공적은 다음과 같다. 서울에서의 3·1독립만세운동과 인근 부산에서의 학생·청년단체의 의거소식을 전해들은 병영 청년회 간부들은 비밀리에 거사를 결의하였다. 왜경의 눈을 피해 거사를 계획하던 청년들은 거사일을 4월 4일로 결정하고, 박영하, 권작지, 이종욱의 집에서 비밀리에 모여『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과 태극수기, 대형 태극기를 만들었다. 선생은 이홍준, 서무출, 최현표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 500매를 작성하며 거사 준비에 참여하였다. 거사 전날 거사에 쓰일 물건들을 가지고 이종근의 집으로 모인 청년들은 거사의 성공과 의지를 다지기 위해 오른쪽 무명지를 깨물어 『決死盡忠報國』을 혈서로 서명하였다. 거사일 오전 9시가 되자 청년들은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 교정에 모여 학생들에게 태극수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었으며, 이종필이 독립선언서 낭독을 마치자 청년과 학생들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 광경을 보고 모여든 주민들에게 선생을 비롯한 청년들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함께 목소리를 높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왜경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시위군중은 더욱 늘어갔으나, 결국 14명의 청년이 체포되고 시위군중은 해산되었다. 남은 청년들은 다음날(4월 5일) 또다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고, 성 내외의 주민들까지 합세한 거사는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돌진하다가 시위 주모자들을 체포하여 압송하는 수비대를 만나 주모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수비대를 포위하였으나 일경의 무차별 발포로 시위대는 해산되고 선생은 피체되었다. 선생은 그 해 4월 22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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