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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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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익록 선생 등 순국선열·애국지사 186명 포상
작성자 : 김성민 작성일 : 조회 : 2,306
부서 공훈심사과
연락처 044-202-5456

 일제기관을 공격하다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받은 강익록 선생 등 순국선열·애국지사 186명 포상

 ◆ 건국훈장 132명, 건국포장 23명, 대통령표창 31명 ◆


▣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오는 3월 1일(일) 제96주년 3·1절을 맞아 일제 경찰관주재소를 공격하다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받고 옥고를 치른 강익록 선생 등 186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한다고 밝혔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132명(독립장 1, 애국장 60, 애족장 71), 건국포장 23명, 대통령표창 31명이다.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96주년 3·1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수여된다. 


▣ 국가보훈처는 일제의 각종 행형기록 및 정보문서, 신문보도 기사의 분석·검토와 적극적인 현지조사를 통해 178명의 독립유공자를 발굴 포상하게 되었다. 포상자 중 12명은 판결문 등 입증자료를 통해 공적내용을 발굴, 확인한 후 읍·면·동사무소에서 제적등본, 가족관계등록부 등을 추적하여 유족을 찾아 포상함으로써 후손들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계기가 되었다.


▣ 이로써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10,246명, 건국포장 1,091명, 대통령표창 2,593명 등 총 13,930명에 이른다.


▣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앞으로도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지방자치단체, 문화원 등과 사료수집 협조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 국외 소장 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함으로써 알려지지 않은 독립유공자를 발굴하는데 더욱 노력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 금년도 제96주년 3·1절 포상자 중 주요 인물들의 독립운동 공적은 다음과 같다


   적의 법정에서도 굴하지 않은 독립운동가의 기개, 강익록 선생

   일제 기관을 공격하다 체포되어 법정투쟁을 벌이고 옥고를 치른 강익록(姜益祿) 선생께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24년 12월 19일 대한통의부 소위 이진무(李桭武)와 함께 평북 선천군 남면의 삼봉주재소를 공격하여 일본인 순사에게 중상을 입히고 창고를 불태우는 등 강력한 투쟁을 벌이다 체포되었다. 『동아일보』보도(1925.11.21)에 따르면, 법정에서 무기징역이 언도되자 선생은 재판장을 향해 대성질호(大聲叱呼)하며 “무기가 아니라 사형도 좋다”고 외치고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로 인해 선생은 무려 16년에 이르는 옥고를 치렀다. 선생의 투쟁 사례는 독립운동 전선에서는 물론 법정에서조차 일제의 그 어떠한 폭압에도 굴하지 않는 우리 독립운동가의 기개를 보여준다.


   일제 침략의 앞잡이를 처단·응징한 의병, 박진양 선생

   경북과 강원도 일대에서 일제 침략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자들을 처단, 응징하고 군자금을 모집한 박진양(朴晋陽)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충북 단양 출신으로, 1909년 경북 영천과 예천에서 동지들과 함께 일진회원을 처단하였다. 같은 해 12월 강원도 평창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받고 11년이 넘는 긴 세월을 차디찬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선생의 활동은 조국이 일제에 강점되는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국권을 되찾기 위해 싸우기는커녕 침략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친일파들에 대한 준엄한 경고인 동시에 의병항쟁의 과정에서 친일 앞잡이들의 해악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준다.


   임시정부에 보낼 독립운동 자금 모집한 승려, 김기출 선생

   승려 신분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낼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김기출(金奇出)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에 승려로 있던 중 1920년 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군자금 모집을 계획하고 경기도 양평과 강원도 홍천군 등지에서 부호 등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징역 7년을 받았다. 일제 기관지 『매일신보』(1921.4.7)는 선생에 대해 “일찍부터 조선독립을 희망”하여 “대한신정부 재무총장 인장을 날인한 군자금모집원이라는 사령서와 금전 영수증을 사용하여 군자금 모집에 종사”했다고 보도했다. 선생의 활동은 독립운동이 신분과 직업을 초월해 이루어졌으며, 사찰이 깊은 산중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 착안, 군자금 모집의 비밀 거점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옥중에서도 저항을 그치지 않은 독립군 분대장, 박의동 선생

   한국과 중국, 러시아 접경지역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박의동(朴義童)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9년 봄 중국 길림성 훈춘현 두도구에 거점을 둔 한민회(韓民會)에 가입, 경호대원으로 독립운동 자금과 군량(軍糧)을 모집하고 이듬해 1월 중국과 러시아 접경에서 탄약 운반에 참여하였다. 국내 진입작전에도 출전, 1920년 3월 함북 온성군 미산(美山) 헌병감시소를 공격하고 1921년부터 1923년까지 한민회 모험대 분대장으로 러시아령 연추, 중국 훈춘현 등지에서 일제 밀정을 단속하다 체포되어 두 번에 걸쳐 징역 15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선생의 활동은 1920년대 초반 중국과 러시아, 한국의 접경지역에서 활약한 무장 독립군단체의 활동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로 주목된다.


   대륙에서 자유를 위해 투쟁한 독립운동가, 정종화 선생

   중국을 무대로 항일 의열투쟁을 벌인 정종화(鄭鍾華)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20년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신대한독립보』발간에 참여하고 1924년 동명학원 교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0년 4월 상해에서 아나키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 결성에 참여하고 3·1기념일 선전물을 살포하였다. 1933년 3월 흑색공포단의 일원으로 일제의 유길(有吉) 공사 처단을 계획하고 자택에 폭탄을 숨겼다가 체포되지 않은 상태로 송국(送局)되어 1935년 7월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기소중지 처분되었고, 이후 남경 방면으로 이동하여 활동을 계속하였다. 부친 정재홍(鄭在洪)은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장으로 활약하며 단연동맹회를 조직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고 일제의 국권침탈에 저항하다 1907년 자결 순국하였다. 정재홍 선생은 2007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명문(名文)으로 준엄하게 왜적을 꾸짖은 영남의 선비, 이두훈 선생

   각종 격문과 상소로 일제 침략자를 성토한 이두훈(李斗勳) 선생께 건국포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896년 2월 곽종석(郭鍾錫) 등과 함께 서울 주재 미국·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 공사관에 「천하포고문(天下布告文)」을 전달하여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국권침탈을 규탄하였다. 1905년 음력 10월에는 이승희(李承熙)·장석영(張錫英) 등과 상경하여 대궐 앞에 나아가 ‘을사오적’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선생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07년 고령의무소장(高靈義務所長)으로 추대되어 경북 고령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였다. 포상은 경북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에 후손이 기탁한 1만여 점에 달하는 서적과 문서 속에서 이두훈 선생이 을미사변(1895)부터 국채보상운동(1907)에 이르기까지 국권회복운동을 벌인 사실을 국가보훈처가 확인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선생의 활동은 가산을 정리하여 가솔을 이끌고 만주행을 결행했던 안동유림의 전형과는 또 다른,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을 지키며 끝까지 저항을 굽히지 않은 영남 유림의 길을 보여준다. 


   광주학생운동 동참 호소한 열 아홉살의 독립투사, 김종락 선생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김종락(金鍾洛) 선생께 건국포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평북 강계 출신으로 1930년 1월 17일 서울에서 배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혈서로 “적혈단심(赤血丹心), 일치단결, 파괴장애, 시위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학우들에게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다 체포되어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선생의 행동은 단호하고도 용감했다. 500명의 학우들 앞에 선 그는 네 번째 손가락을 잘라 피로 쓴 깃발을 치켜들고 “배재의 건아들아, 좀 더 원기를 내어서 만난(萬難)을 배제하고 일치단결로 장래를 돌파하여 시중에 뛰쳐나와 대 시위행렬 운동을 실행하자! 이 혈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자유만세를 고창할 지어다”(「보안법위반 피의사건 보고」, 1930.1.17)라고 열변을 토하며 학우들을 이끌고 거침없이 내달렸다. 선생은 뒤에 경찰 신문에서 어린 나이에도 전혀 두려움 없이 “아무리 많은 경찰관이 경계하고 있더라도 700여 학생들이 일단이 되어 밀어붙인다면 희생자가 있더라도 교외로 진출하기는 무난할 것이다(중략)시위행렬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한다”(「제1회 김종락신문조서」, 1930.1.19) 고 주장했다. 과감한 투쟁의 배경에는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조국탈환 작전에 뛰어든 재미한인사회의 엘리트, 이근성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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