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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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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주년 광복절 맞아 독립유공자 192명 포상
작성자 : 김성민 작성일 : 조회 : 3,368
부서 공훈심사과
연락처 044-202-5456

 ◆ 세번의 투옥 끝에 옥중 순국한 송중직 선생 등 독립유공자  192명 포상
   - 3·1운동 피살자 명부 등재자 30명도 포상
   - 독립유공자의 미전수 훈장을 후손에게 찾아주기 위한 노력도 강화 -

 

▣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오는 8월 15일(금) 제69주년 광복절을 맞아 192명의 독립유공자를 포상한다. 여기에는 작년 6월 주일 한국대사관 이전 과정에서 발견된『3·1운동 피살자 명부』(1953)에 등재된 30명이 포함되어 있다. 포상자 중 생존 애국지사는 없으며, 여성은 4명이다. 훈격별로는, 건국훈장 161명(독립장 3, 애국장 87, 애족장 71), 건국포장 17명, 대통령표창 14명이다.

 

▣ 훈장증은 제69주년 광복절 중앙기념식장에서 5명의 독립유공자 후손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친수하며, 26명의 후손에 대해서는 지방자치단체와 해외 공관을 통해 유족에게 전수된다. 그 외, 후손이 확인되지 않는 161명의 훈장증은 독립유공자의 유족이 확인되는 대로 전수된다.

 
▣ 2013년 주일한국대사관에서 발견된『3·1운동 피살자 명부』에 수록된 독립유공 미포상자 중 54명을 심사에 부의하여, 30명을 포상하게 되었다.
명부에는 총 624명이 수록되었으며, 260명은 이미 독립유공자로 포상되었고, 미포상자 364명 중 명부 외의 기록이 있거나, 제적부에서 사망날짜가 확인된 54명을 심사에 부의하였다.
국가보훈처는 이 분들의 공적 확인을 위하여 3·1운동 당시의 판결문, 일제의 정보보고서, 신문기사 등을 비롯하여 군지·읍지 등 지방지 76종, 지역 간행 3·1운동사 87종 등 관련 문헌을 폭넓게 조사하였다.
또한, 28개 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제적원부를 확인하고, 현지의 기념조형물을 조사하였으며, 전문가의 자문을 거쳤다. 
명부 등재자 중 아직 포상되지 못한 334명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관련 문헌과 제적부 등을 조사하여 공적을 확인할 계획이다.

 

▣ 이로써 지금까지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10,083명, 건국포장 1,065명, 대통령표창 2,553명 등 총 13,701명에 이른다.

 

▣ 국가보훈처는 전수하지 못하고 있는 독립유공자의 훈장을 그 후손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후손 찾기를 적극 추진할 계획이다. 유족의 신청이 아닌 정부 주도의 독립유공자 발굴·포상이 확대되면서, 훈장 등을 전수하지 못하는 사례 역시 증가하였다. 
금년 7월말을 기준으로 총 포상자 13,509명 중 34%에 달하는 4,586명의 훈장이 전수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본적·주소 등이 확인되지 않아 제적부 조회가 불가능하거나(1,836명), 북한지역이 본적지여서 후손을 찾지 못하고 있거나(1,874명), 제적부가 소실되었거나 후손·친족이 없기(143명) 때문이다. 이 외, 주소지가 확인되는 733명에 대해서는 후손을 찾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 오고 있다.

그동안 국가보훈처는 지방자치단체에 독립유공자의 제적부 확인을 의뢰하고, 본적지 출장 조사를 실시하는 한편 재외공관, 광복회 등 관련기관에 명단을 게시하는 등 독립유공자의 후손을 찾기위해 노력해왔다.

 

▣ 앞으로는 이를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에 대한 국민 인지도를 높이기 위하여 대상 집중형·지역 밀착형 홍보를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우선 본적지가 확인된 분이나 북한 본적의 독립유공자의 후손을 집중적으로 찾기 위하여 반상회보, 지역신문, 중국동포신문, 이북5도신문, 온라인 이벤트(‘독립유공자의 후손을 찾습니다.’ 8.12~8.28), 온라인 웹툰 등을 통하여 후손 찾기 캠페인을 적극 실시한다. 훈장을 전수받지 못한 독립유공자의 명단은 국가보훈처 홈페이지(팝업창)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앞으로도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발굴·포상과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를 통하여 독립운동가의 희생·헌신을 기억하고 공훈을 선양하는 일을 지속해 나갈 것이다. 

 

▣ 금년도 제69주년 광복절 포상자 중 주요 인물들의 독립운동 공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국권회복의 제단에 함께 바친 부자(父子) 의병의 충절, 이원범 선생
   전라북도 고창에서 부친과 함께 의병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순국한 이원범(李元範)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07년 11월 기삼연(奇參衍) 의병부대에 소속되어 부친과 함께 고창읍내 일본인 상점과 일본군 분파소를 공격하다 체포되어 총살, 순국하였다. 부친 이남규(李南奎) 선생도 이때 아들과 함께 체포, 순국하여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그동안 순국 여부가 확인되지 않아 포상이 보류되었으나, 최근 간행된 『진중일지』(1907)에서 순국사실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진중일지』는 1907~1909년 영·호남 일대에서 일본군 14연대가 의병을 탄압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일제의 정보보고에 따르면 선생은 “1907년 11월 1일 고창군읍을 습격하고 폭도의 도당으로 부 남규는 폭도의 참모로서 중요 위치에 있고 그 아버지의 수족이 되어”(『폭도에 관한 편책』)라고 하여 부자의 활동이 일심동체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3·1운동 시위 현장에서 사망·순국 사실이 확인된 순국선열
   『3·1운동 피살자명부』(1953)(이하『명부』로 약기)를 통해 30명의 독립유공자를 포상한 것도 이번 포상의 특징이자 성과로 꼽힌다. 이 가운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는 대표적인 분들의 공적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이낙현(李洛鉉) 선생은 1919년 3월 경남 합천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일경의 총격을 받고 순국하였다.『명부』에 순국일자와 장소, 순국사유 등이 기재되어 있고,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제적부와 문헌자료에서 확인된다.
   - 최윤식(崔允植) 선생은 1919년 2월 경기도 양평에서 부친[養父, 崔大鉉, 1995 애국장]을 도와 광무황제 승하 애도 기부금 모집 취지문을 인쇄, 배포하고 4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일경의 총격을 받고 순국하였다.『명부』에 순국일자와 장소, 순국사유 등이 기재되어 있고,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부친 최대현의 판결문과 문헌자료, 제적부에서도 확인된다. 부자(父子)가 함께 광무황제 서거에 대한 애도 분위기를 활용하여 만세운동을 고조시키려 했던 흔치 않은 사례로 주목된다.
   - 김순서(金順西) 선생은 1919년 4월 경기도 안성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원곡면사무소와 양성면우편소 등 일제의 시설을 공격·파괴하다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받고 옥중 순국하였다.『명부』에서 순국시점과 장소가 확인되고, 면밀한 현지조사를 더하여포상이 이루어졌다.
   - 박원개(朴元介) 선생은 1919년 3월 경남 함안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일경의 총격으로 피살, 순국하였다.『명부』에 순국시점과 장소, 순국사유 등이 명기되어 있고, 동일한 내용이 현지조사를 통해 발견된 제적부에서도 확인된다.    

    서해 섬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무려 19년의 형을 받고 순국한 송중직 선생
   5년여에 걸쳐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세 번의 투옥 끝에 옥중 순국한 송중직(宋重稙) 선생께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인천 앞바다의 섬 신도의 사립학교 교사 출신으로, 1921년 황해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았고, 1923년 3월 인천의 섬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징역 8년을 받았다. 형 집행정지로 출옥한 뒤 다시 1925년 10월 황해도 송화·은율군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받고 복역 중 순국하였다. 선생의 순국 사실은 동지 김재도(金在道)와 임택종(任澤鍾)의 가출옥관계 서류에서 확인된다. 순국하기 직전의 옥고기간만 7년이 넘고 세 차례에 걸쳐 받은 형량(刑量)은 19년에 이른다. 황해도와 인천의 섬들을 무대로 대대적인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한 선생의 활동은『동아일보』와『매일신보』,『독립신문』(상해판)에도 대서특필되어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20년간 중국관내와 만주를 누빈 독립운동의 거목, 백남준 선생
   일제의 한국강점 직후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중국관내와 만주를 무대로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한 백남준(白南俊) 선생께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다. 평북 운산 출신인 선생은 1912년 조선총독 사내정의(寺內正毅) 암살미수 사건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무죄 석방된 뒤, 1919년 3월 중국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에서 한인공회를 설립하였다. 1920년 광복군총영에 입단하여 군사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21년 5월 상해에서 국민대표기성회 위원에 선출되고, 8월에 남만한족통일회에 참석하였다. 1922년 1월에는 광복군총영 대표로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였다. 1923년 상해 국민대표회의에서 개조파로 활동하였고, 7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헌법개정기초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9월 통의부 대표로 전만통일회의에 참석한 뒤, 11월 정의부 설립에 참여해 동 검판부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927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일제 길림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았다. 선생은 1920~30년대 독립운동 단체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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