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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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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68주년,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 207명 포상
작성자 : 이현주 작성일 : 조회 : 3,266
부서 공훈심사과
연락처 02-2020-5238

광복 68주년,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다 체포되어 징역형을 받은 대한애국부인회 여걸 4인방 등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 207명 포상
◆ 건국훈장 129명, 건국포장 30명, 대통령표창 48명 ◆

▣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15일(목) 제68주년 광복절을 맞아 평양을 거점으로 평안남도 일대에서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거액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대한애국부인회 박승일 선생을 비롯하여 207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한다고 13일(화) 밝혔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129명(독립장 1, 애국장 34, 애족장 94), 건국포장 30명, 대통령표창 48명으로서 이 가운데 여성은 7명이며 생존자는 없다.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68주년 광복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수여된다.

▣ 국가보훈처는 일제의 각종 행형기록 및 정보문서, 신문보도 기사의 분석?검토, 적극적인 현지조사를 통해 207명의 독립유공자를 발굴 포상하게 되었다. 특히 이번 포상자 중 21명은 판결문 등 입증자료를 통해 공적내용을 발굴, 확인한 후 다시 읍?면?동사무소에서 제적등본, 가족관계등록부 등을 거꾸로 추적하여 유족을 찾아 포상함으로써 후손들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계기가 되었다.

▣ 이로써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1949년 독립유공자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9,831명, 건국포장 1,036명, 대통령표창 2,507명 등 총 13,374명에 이른다.

▣ 앞으로도 국가보훈처는 독립기념관과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지방자치단체와 문화원 등과 사료 수집 협조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 국외 소장 자료를 지속적으로 발굴함으로써 숨겨진 독립유공자를 찾는데 더욱 노력해나갈 계획이다.

▣ 금년도 제68주년 광복절 포상자 중 주요 인물들의 독립운동 공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만주에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독립군 소대장 박창철 선생
   이번 포상자 가운데에는 세 번에 걸쳐 도합 16년의 징역을 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박창철 선생이 포함되어 있다. 선생은 1920년 전후 중국에서 광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참의부에 들어가 제2중대 소대장으로 활동하다 1930년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을 받았으며, 출옥 후 1935년 조선혁명군 제1소대장으로 남만주의 일제 통치기관을 공격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다 다시 체포되어 1938년에 징역 12년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1941년에는 수감 중 일본인 간수가 수형인을 살해하자 이에 항의하는 투쟁을 주도하다 징역 1년이 가형(加刑)되었다. 1919년 독립군 양성의 요람이던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가 문을 닫은 뒤 독립운동에 뜻을 둔 한국청년들은 개별적으로 혹은 임시정부의 소개로 중국 내 각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한 뒤 독립군 지휘관으로 활약하였는데, 불요 불굴한 선생의 투쟁은 이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사례에 속한다.

   ? 모든 것을 잃고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일깨운 형제 의병
   1910년 경 전라북도 일대에서 유치복(柳致福) 의진(義陣)의 간부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감옥에서 순국한 이원옥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외삼촌인 유치복 의병장의 의진에 동생 이순옥(李順玉)과 함께 참여하여 활동하던 중 의병장의 체포로 의진이 해산되자 은둔하였다가 체포되었다.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외삼촌을 따라 거의한 원옥?순옥 형제의 비극적인 인생 역정은 1925년 9월 22일 『동아일보』에 소개되면서 당시 가혹한 식민지 지배에 신음하고 있던 한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보도에 따르면 형 원옥은 옥사하고, 동생 순옥의 부인은 개가(改嫁)하였으며, 형제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재산은 감옥생활 중에 전부 임의로 처분되었다. 이에 징역 15년을 받고 11년의 옥고를 치르고 1925년 9월 가출옥한 동생은 자결로써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원옥?순옥 형제의 항쟁 사례는 일제의 이른바 ‘남한 대토벌작전’의 야만성과 전라북도 일대에서 전개된 후기의병 최후의 활약상을 보여준다. 외삼촌 유치복 선생과 동생 이순옥 선생에게는 각각 1991년과 199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친일 협력자를 응징하고 일제 시설까지 공격한 장군선 의병장
   1909년 8월 충청북도 영동에서 조석우(趙錫祐 : 2010, 애국장) 의진의 부장으로 활동한 장군선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양내면 영국사(寧國寺)에서 개최된 회합에서 “한국을 순연한 독립국으로 하기 위해 일본인과 일본인에 고용되어 있는 한국인 전부를 처단하고 철도, 정거장을 파괴하자”는 의진의 투쟁 방략에 적극 호응하여 각 처에 격문을 띄우는 한편 투쟁에 동참할 장정과 군량미를 모집하는 등의 활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받았다. 선생의 활동은 의병이 일본군과의 전투는 물론 조선총독부 관리, 친일 협력자까지 처단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바로세워 독립운동의 독소를 제거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장기 항전을 예상하고 철도와 정거장 등 시설의  파괴, 군량미의 수집 등 광범위한 활동을 펼쳤다.  
  
   ? 적의 헌병대 앞에서 대담하게 독립만세를 외친 이균형 선생
   1919년 3월 황해도 수안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던 중 순국한 이균형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동년 3월 3일 대담하게도 일제의 수안헌병분대 사무소 앞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된 뒤 수감 상태에서 재판을 받던 중 일제의 혹독한 고문으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황해도 수안은 3?1운동 기간 중 만세시위가 가장 격렬하게 일어난 곳 중의 하나로, 식민지 무단통치의 상징인 일제 헌병대 앞에서 시위는 더욱 격렬하였다. 선생에 대한 서훈은 국가기록원에 소장된『형사공소사건부』에서 이균형 선생이 재판 도중 감옥에서 순국한 사실이 새롭게 발견됨으로써 이루어졌다.  

   ? 서북을 무대로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다 체포된 여걸 4인방
   1919년 11월 평안남도 평양 일대에서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에 참여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며, 배일사상을 고취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박승일, 이겸양, 김성심, 김용복 등 4명의 여성 독립운동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이들 중에는 3?1운동에 참여했다 체포되어 이미 옥고를 치른 분(김성심)도 있고, 의학견습생(박승일)과 교사(이겸양), 전도사(김성심)와 은행원(김용복) 등 직업도 다양하다.
   대한애국부인회는 일제 당국에 발각되어 조직이 와해될 때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지원활동에 주력하여 2,400여 원에 달하는 거액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냈다. 1920년 10월의 검거를 시작으로 강서경찰서에 압송된 대한애국부인회 임원과 회원여성들은 3년에서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특기할만한 것은 체포된 여성 대부분이 1심에서 징역 6월을 받았다가 2심에서 2~3년의 중형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바로 1년 전, 전국적인 독립만세운동을 확실하게 진압했다고 확신했던 일제가 서북지역 3?1운동의 진원지인 평양에서 항일 비밀결사, 그것도 여성들에 의한 대규모 저항에 직면하자 향후 독립운동 발생의 싹을 자르고자 자행한 초법적인 만행이었다.

   ? 대담무쌍한 활동으로 ‘여자독립군’ 칭호를 얻은 장태화 선생
   중국 길림성 연길현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된 장태화 선생도 주목된다. 선생은 1924년 11월 48세의 나이에 연길현 용정촌에서 대동회의 선전원으로 용정촌 일대에 독립운동 선전문서를 배포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았다. 대동회는 천도교 계통의 항일단체로 만주에서 임시정부와 연계, 선전문서를 배포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에 주력하였다. 선생의 활약상은 당시 언론에서「국경에서 활동하던 여자독립군, 군자금 모집에 남자보다 더 활동」이라는 제하에 “장태화는 삼일운동 당시 극단의 독립운동 사상을 품고 과격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아무리 취조해도 여자 선전원 수라든지 연락관계와 또는 범행 등을 죽어라하고 자백하지 않는다”(『동아일보』1925.1.17)고 대서특필되었다.

   ? 군자금을 모집하고 총기를 보관하다 고초 겪은 임정 국내기관 간부 최방연 선생
   1920년 9월 함경북도 회령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제 함경북도 독판부 경감으로 활동한 최방연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21년 7~8월 경 회령에서 독립운동에 필요한 권총과 다량의 탄환 등 임시정부 요원으로부터 전달받은 총기류를 자택에 보관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징역 3년 6월을 받았다. 선생 등의 활동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기 국내 활동이 연통제에 의한 국내 연락기관 설립에 머무르지 않고, 이들 기관을 거점으로 무력투쟁까지도 전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미주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기부하고 냅코작전에도 참여한 차진주 선생
   1940년부터 1942년까지 미주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 재무, 구제위원, 서기 겸 사교부 위원, 선전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4년 1월 미군에 자원 입대하여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전략첩보국) 한인교육반에 배치되어 냅코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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