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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사진

국가보훈부(국문) - 참여사진 상세보기 -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제목, 내용, 파일 정보 제공
독립운동 중 많은 애국자분들이 투옥되어 옥고를 치른 역사의 경성형무소 모습
작성자 : 정병기 작성일 : 조회 : 913
증조부님 명예회복을 진정으로 바랍니다. 진실.화해를 과거사정리위원회에 바랍니다. 저의 증조부님이신 고 정 용선의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을 지난 30영년간 하다가 진실.화해 위원회를 증조부의 관련한 서류를 정식으로 접수하여 조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과정에 박 세미 조사관님이 담당하셨는데 다른 분이 조사를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젖하고 이제는 전혀 다른 소식을 듣지 못하고 금년 2006년 경술년을 넘기는 것 같아 궁금합니다. 저의 증조부님의 관한 조사가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답변을 보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증조부 독립운동 밝히려 30년 `고군분투''> 1928년 경성형무소 감방에서 사망하신 증조부 명예회복 되어야 바람직. 1928년 경성형무소 감방에서 사망하신 증조부 명예회복 되어야 바람직. 이제 정부가 실질적인 행동에 나서야 할때. 구호 보다는 실천이 우선되는 태도 보여야 마땅. 왜 호적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면 나머지는 정부가 책임져야 하지 않는가? 미발굴 독립유공자에 정부가 발굴에 앞장서야 바람직 진정한 한국의 독립은 미발굴 독립유공발굴이 되어야 참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증손자인 나는 반드시 자손된 도리를 하고 싶다. 여러분 꼭 도움을 주시기 바랍니다. *증조부(정용선)의 호적 주소는 성명:정용선 출생년월일:서기1883년12월17일생(명치16년12월17일생) 본젹지:경북 봉화군 춘양면 도심리 391번지 거주지:대정3년 충청북도 청주군 양성면 도원리3통1호 대정4년 경북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7통10호 경북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 1062번지 전국을 무대로 독립운동(독립자금 군자금)을 담당 하였다고 함 사망기록:제정호적에 소화3년5월20일 오후3시20분 경성형무소 감방(서기1928년5월20일오후3시20분사망)형무소에소 통지하여 호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꼭 저의 증조부에 대한 기록을 찿을 수 있게 관심을 가져 주시고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이모든것을 정부가 마땅히 해야 옳은것 같은데 가족에게만 자료를 요구하는 것은 부당한 생각이 듭니다.그리고 일본인이 작성한 제정호적에 수형기록이나 옥사기록이 있으면 우선적으로 호적을 검토하여 그에 해당하는 적절한 조치가 있어야 할것 같습니다. 저는이번에"민족문제연구소"에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꼭 좀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이지 친일문제가 청산되고 역사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현재 그동안 찿은 많은 자료가 있습니다. 이제는 진정한 독립유공자 발굴에 정부가 앞장설때... 증보주의 진정한 독립운동의 명예회복을 원합니다.도움 좀 주십시요 경성형무소에서 사망하신 증조부 명예회복 바랍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받치신 증조부 구천을 맴돌고 계시네요? 이글을 보시는 역사학자분계서는 관심을 가져 주시기 당부 드립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친 고 정용선 증조부 명예를 회복시켜 주세요. 지금까지 20 여년째 증손자가 노력하고 있답니다. 제발 귀를 기울려 주셨으면 합니다.남의일로만 생각지 마시고 관심가져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증손자도 국가를 위해 희생한 국가유공자랍니다. 저는 저의 증조부(고 정용선)독립운동에 대한 자료발굴과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20여년을 노력해 왔습니다만 아직까지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정호적원부에 수형기록과 사망기록이 있슴에도 판결문을 찿지 못하여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정부의 결단이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희 부친은 문맹인으로 살고 계시며 평생 어렵게 할아버지도 일찍 일제핏박과 고문에 돌아 가시고 고아 아닌 고아로 어렵게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신 분이십니다. 이미 저의 증보부자료에 대해서는 국가보훈처에 제출한지 오래이며 민족의 비극인 6.25사변 으로 인하여 경성형무소가 소실되고 지방에 본적지 면사무소가 소실되어 더이상의 자료를 수집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번에 각하의 따뜻한 관심이 애타게 조상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후손들에게 큰힘이 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세한 자료는 국가보훈처 자료관리과 또는 선양과에 있습니다.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독립유공자 후손 시혜적 보훈정책 구조적 원인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가난 대물림과 배움기회 박탈, 또 계층 하락은 거꾸로 간 역사의 구조적 잘못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다. 이와 함께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진정한 예우 차원이 아닌 시혜 차원에서 도입된 보훈정책도 가난·무지의 대물림을 고착화 고립화되어 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말보다 실천이 우선되어야 하며 힘없고 빽없는 서민과 관련한 독립유공자 발굴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저는 독립운동가의 자손이자 국가유공자로서 일제침략에 항거하며 목숨을 바치며 옥중에서 순국하신 증조부(고 정용선)의 명예를 회복 하고자 20 여년의 세월을 노력하여 온바 있으며 아직까지 그 결과를 얻지 못하여 부득이하게 외교통상부에 글을 드리게 됨을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전국은 물론 외무부를 통하여 찿은 자료가 결정적인 자료로서 미흡하여 주일 한국대사관을 통하여 일본 법무성의 자료를 구하고 있으며 일제침략기에 상당한 자료가 일본내 도서관이나 기록보존소에 보관되어 밝혀지고 있는 추세로 "역사바로세우기"관점과 국가와민족을 위해 순국하신 선열들의 명예회복 차원에서 외교관의 명예를 가지고 노력하여 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도 한바 있으나 무성으로 일관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내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러한 일들을 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영원히 암흙속에 가리우게 되지 않겠나 생각됩니다. 제가 지금까지 노력한 모든 것을 정리하여 보내드리니 쉽지 않은 일이지만 당부를 드립니다.자료중에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제정호적사본"과 미국의 ''문서보존소 회신문" 도 있으니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몸이 불편한 국가유공상이자입니다. 하지만 제가 증조부의 명예회복을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이것을 찿을 사람이 없는 형편입니다. 이제 제가 조상의 명예를 찿지 않는다면 영원히 땅에 묻힐것입니다. 증보부(정 용선)께서 "경성형무소에서 순국하셨기에 더더욱이 자료가 있을것으로 추정되며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치밀한 계획과 탄압정치사로 볼때에 반드시 조선의 의병과 독립운동가들의 자료가 어디엔가 소장되고 있을것으로 사료됩니다. 어느덧 벌서 해방된지 60여년이 넘고 있습니다. 이문제들이 조속히 일본의 협조를 얻어 해결되어야만이 한일관계정상화와 더블어 일본의 국제적인 책임도 반드시 져야 될것으로 생각됩니다.반드시 국가외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받치신 애국선열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 지는데 주일한국대사관이 중요역활을 하여 주시기를 요망합니다. 그럼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증조부(정용선)의 호적 주소는 성명:정용선 출생년월일:서기1883년12월17일생(명치16년12월17일생) 본젹지:경북 봉화군 춘양면 도심리 391번지 거주지:대정3년 충청북도 청주군 양성면 도원리3통1호 대정4년 경북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7통10호 경북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 1062번지 전국을 무대로 독립운동(독립자금 군자금)을 담당 하였다고 함 사망기록:제정호적에 소화3년5월20일 오후3시20분 경성형무소 감방(서기1928년5월20일오후3시20분사망)형무소에소 통지하여 호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꼭 저의 증조부에 대한 기록을 찿을 수 있게 관심을 가져 주시고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이모든것을 정부가 마땅히 해야 옳은것 같은데 가족에게만 자료를 요구하는 것은 부당한 생각이 듭니다.그리고 일본인이 작성한 제정호적에 수형기록이나 옥사기록이 있으면 우선적으로 호적을 검토하여 그에 해당하는 적절한 조치가 있어야 할것 같습니다. 저는이번에"민족문제연구소"에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꼭 좀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이지 친일문제가 청산되고 역사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현재 그동안 찿은 많은 자료가 있습니다. 증손자 국가유공자 정병기 [연합뉴스 2006-08-13 17:14] "내 증조부는 당당한 독립군이었소" 매년 광복절 때면 독립운동의 발자취와 가슴 아픈 식민 통치의 기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지만 정작 그런 영광과 상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정을 못 받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의 영광을 기억하고 상처를 치유해 줘야 할 정부가 팔짱 끼고 있는 사이, 정부 대신 과거의 흔적을 찾아 나선 후손들이 있다. 두 사람을 만났다. ■ 증조부 행적 찾아나선 정병기씨 = 14일 정병기 씨(49)는 100년 전 증조부의 행적을 찾기 위해 충남 청원군으로 갈 채비를 했다. 증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닌 지 벌써 30년째다. 증조부가 활동했다고 알려진 경북 봉화군 모든 면사무소의 기록물 보관소는 이미 수차례 이 잡듯 뒤졌다. 정씨에 따르면 증조부 정용선 선생(1883년생)은 봉화군 일대에서 독립군 군 자금을 모으는 독립활동을 벌이다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정씨는 전국 각지를 돌며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기록이 담긴 호적과 당시 봉화군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벌인 독립군 명단을 입수했고, 증조부가 생존 당시 소년이었다는 90대 노인의 증언을 녹취하고 친필 증명도 받았다. 하지만 구체적인 죄목이 담긴 수형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보훈 당국은 국가 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통보해 왔다. 정씨는 1989년부터 수형 기록 등을 찾기 위해 법무부, 경찰청, 국사편찬위원회 등을 비롯한 국내 유관 기관에 민원을 제기했다. 그럴 때마다 "해당 자료를 보관하지 않으니 다른 부처에 알아보라"는 답신이 전부였다. 그러던중 정씨는 봉화군청으로부터 `수형인 명부는 형의 실효 등에 관한 법률(1980년 12월 18일 제정, 1984년 7월 30일 개정)에 근거해 폐기(소각)됐다`는 회답을 받았다. 그는 이에 대해 "일제강점기 옥살이를 한 독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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