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참여사진

국가보훈부(국문) - 참여사진 상세보기 -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제목, 내용, 파일 정보 제공
13.43■. 2.8독립선언문, 3.1운동, 기미독립선언문을 돌아보면서.
작성자 : 송철효 작성일 : 조회 : 1,562
13.43■. 2.8독립선언문, 3.1운동, 기미독립선언문을 돌아보면서. ●. 2.8독립선언문(3.1운동의 기폭제). ▲. 1918년 와세다대학 철학과 학생이던 이광수는 베이징에 건너가 체류 중에 제1차 세계대전의 휴전 민족자결 원칙 윌슨 강령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중국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파리 강화회의에서 중국의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였다. 이광수도 조선 독립의 희망을 품었으며 파리강화회의에 중국대표 주정샹 구웨이준 후웨이더 등이 베이징을 떠난 후 이광수는 서울로 돌아가 현상윤 그리고 최린과 독립운동을 논의하였다. 이광수는 11월 동경으로 돌아가 와세다 대학의 정경과에 있던 최팔용을 만나 결의를 밝혔고 최팔용은 백관수, 김도연, 서춘, 김철수, 최근우, 김상덕 등의 동지를 얻었다. 이광수는 원문을 쓰고 영문으로 번역을 하였다. 최팔용은 이광수가 상해에 피하여 있을 것을 권유하였고 이광수는 이 요구를 따라 상하이로 피신하였다. 본 독립선언은 만주 지린에서 발표되었던 무오 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김규식의 지시에 따라 조소앙이 동경에 파견되어 유학생들을 지도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 전 조선청년독립 단은 아 2천만 민족을 대표하야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한 세계만국의 전에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 4천3백년의 장구한 역사를 유한 오족은 실로 세계 고민족의 하나이라. 비록 유시호 중국의 정삭을 봉한 사는 유하얏스나 차는 양국왕실의 형식적 외교관계에 불과 하얏고 조선은 항상 오족의 조선이고 일차도 통일한 국가를 실하고 이족의 실질적 지배를 수한 사 무하도다. 또 합병 이래 일본 조선통치 정책을 보건대 합병시의 선언에 반하야 오족의 행복과 이익을 무시하고 정복자가 피정복자에 대한 고대의 비인도적 정책을 습용하여 오족에게 참정권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 등을 불허하며 심지어 신교의 자유 지업의 자유까지도 불소히 구속하며 행정 사법 경찰 등 제기관이 조선민족의 사권까지도 침해하며 공사간에 오인과 일본과의 우열의 차별을 설하며 오족에게는 일본인에 비하야 열등한 교육을 시하야서 오족으로 하여금 영원히 일본인의 사용자로 성케 하며 역사를 개조하야 오족의 신성한 역사적 전통과 위엄을 파괴하고 능모하며 소수를 제한 이외는 정부 제 기관과 교통 통신 병비 등 제 기관에 전부 혹은 대부분 일본인을 사용하야 오족으로 하여금 영원히 국가생활에 지능과 경험을 득할 기회를 부득케 하니 오인은 결코 여차한 무단전제 부정 불평등한 정치 하에서 생존과 발전과를 향유키 불능한지라. 그뿐더러 원래 인구 과잉한 조선에 한으로 이민을 장려하고 보조하야 토착하니 오족은 해외에 유리함을 불면하며 정부의 제기관은 물론이고 사설의 제 기관에까지 일본인을 사용하야 일단 조선인의 부를 일본으로 유출케 하고 상공업에도 일본인에게만 특수한 편익을 여하야 오족으로 하야금 산업적 발흥의 기회를 실케 하도다. 여차히 하 방면으로 관하야도 오족과 일본과의 이해는 상호배치하야 기해를 수한 자는 오족이니 오족은 생존 권리를 위하여 독립을 주장하노라. 최후 동양평화의 견지로 보건대 위협이던 아국은 이미 군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하고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신국가의 건설에 종사하는 중이며 중화민국도 역연하며 겸하여 차후 국제연맹이 실현되야 다시 군국주의적 침략을 감행할 강국이 무할 것이다. 그러할진대 한국을 합병한 최대이유가 소멸되었을 뿐더러 차로부터 조선민족이 무수한 혁명란을 기한다면 일본에게 합병된 한국은 반하야 동양평화의 요란하고 화원이 될지라. 오족은 정당한 방법으로 오족의 자유를 추구할지나 만일 차로써 성공치 못하면 오족은 생존의 권리를 위하야 온갖 자유행동을 취하야 최후의 일인까지 자유를 위하는 열혈을 유할지니 어찌 동양평화의 화원이 아니리오? 오족은 일병이 무하니 오족은 병력으로써 일본에 저항할 실력이 무하도다. 일본이 만일 오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할진대 오족은 일본에 대하야 영원의 혈전을 선하리라. 오족은 구원히 고상한 문화를 유 하얏고 반만년 간 국가생활의 경험을 유한자라 비록 다년간 전제정치하의 해독과 경우의 불행이 오족의 금일을 치하얏다 할지라도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의 선진국의 범을 취하야 신국가를 건설한 후에는 건국 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오족은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함이 유할 줄을 신하노라. 자에 오족은 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이 오족에게 자결의 기회를 여하기를 요구하며 만일 불연이면 오족은 생존을 위하야 자유의 행동을 취하야 써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 재일본 동경조선청년독립 단 대표. 최팔용 , 이종근 , 김도연 , 송계백 , 이광수 , 최근우 , 김철수 , 김상덕 , 백관수 , 서춘 , 윤창석. ●. 3.1운동 (三一運動). ▲. 1910년 국권피탈 후 일제는 경제적으로 한국인의 이권을 빼앗고 한민족 고유의 문화를 말살하려 하였다.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전국토의 40%를 점유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이민(日本移民)에게 헐값으로 토지를 불하하여 그 결과 한국의 영세농민은 토지를 잃고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또한 일제는 독립운동이나 애국운동을 탄압하고 식민지교육을 강요하는 등 사회적·문화적 활동을 봉쇄하는 무단정치를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독립 운동가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거나 혹은 지하로 숨어서 비밀리에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1918년 1월 8일 미국의 T.W.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자 민족지도자들은 이에 의거하여 한민족의 독립을 호소해 보고자 하였다. 상하이[上海(상해)]에 망명중인 애국지사들은 파리강화회의 개최와 민족자결론에 관한 보도를 보고 회합하여 김규식(金奎植)을 파리강화회의에 여운형(呂運亨)을 소련에 각각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게 하는 한편 장덕수(張德秀)를 일본에 보내어 한국인유학생들과 연락을 취하고 김철(金澈)·선우혁(鮮于赫) 등을 국내로 잠입시켜 비밀리에 활동을 개시하도록 하였다. 국내에서도 민족자결주의사상이 차츰 알려지게 되자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렇게 고조된 독립운동의 분위기에 불을 당긴 것은 일본에서 거행된 2·8독립선언이었다. 당시 일본의 한인유학생들 사이에는 여러 애국단체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1912년 10월 27일 조직된 조선유학생학우회는 항일독립사상이 충일한 단체였다. 이들은 저팬 애드버타이저 에 재미동포의 활동상황이 보도되자 비밀리에 독립 문제를 토의하고 1919년 1월 6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개최하여 민족자결주의원칙에 따라 한국의 독립을 일본내각과 각국 대사관 및 공사관에 청원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 실행위원으로 최팔용(崔八鏞)·송계백(宋繼白)·최근우(崔謹愚)·서춘(徐椿)·김도연(金度演)·백관수(白寬洙) 등을 선출한 후 비밀회합을 거듭하여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작성하였다. 또한 송계백과 최근우를 국내에 파견하여 최린(崔麟)·송진우(宋鎭禹)·최남선(崔南善) 등과 접촉하게 하여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청하는 동시에 활자와 운동자금을 마련하여 오도록 하였다. 마침내 같은 해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600여 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열렸다. 이 회합에서 한국독립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천명한 독립선언서를 백관수가 낭독하고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대회가 끝날 무렵 도쿄[東京(동경)] 경시청에서 급파된 경찰대가 장내에 진입 실행위원 10명이 검거되었다. 이에 유학생들은 전원 귀국할 것을 결의하고 국내에 돌아와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3월 1일에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에 합류하였다. 국내에서는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된 이래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어 가고 있을 때 고종이 급서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 이래 지하에서 비밀리에 독립사상을 고취하며 독립운동의 기회만을 찾고 있던 일부 민족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원칙 발표, 재일유학생의 2·8독립선언, 고종의 급서 등이 계기가 되어 민족적 항일의식이 고조되자 이때가 한민족의 독립을 꾀할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거족적인 3·1운동을 본격적으로 계획하였다. 1918년 말부터 천도교측은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최린·손병희(孫秉熙)등을 주축으로 구체적인 추진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독립운동의 3대원칙으로 독립운동을 대중화할 것, 일원화할 것 비폭력적으로 할 것 등을 결정하고 그리스도교·불교·유림 등 각 교단을 총망라하는 동시에 대한제국시대의 유지들을 민족대표로 추대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에 송진우·최남선 등은 조선 말기의 인사들과 협의하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하여 민족대표에서 그들을 제외하기로 하였다. 이때 최남선은 그리스도교 측에서도 독립운동계획이 있는 것을 알고 그리스도교 측의 대표자격인 이승훈(李昇薰)에게 연락 교섭하였다. 이승훈은 1919년 02월 12일 김성수(金性洙)의 별장에서 송진우·신익희(申翼熙)를 통하여 이같은 계획을 듣고 독립운동에 합류할 것에 찬성하고 그리스도교 측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불교측과의 교섭은 최린이 담당하였다. 그는 승려 한용운(韓龍雲)과 독립운동 계획에 관해 협의하고 응낙을 얻어냄으로써 불교측과의 연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한용운은 해인사 주지 백용성(白龍城)과 협의하여 동참하게 하였다. 한편 같은 해 1월 하순 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 박희도(朴熙道)는 김원벽(金元璧)과 만나 서울 각급학교의 졸업생 및 재학생의 주요 인물들과 대관원(大觀園)에서 독립운동에 관하여 토론하고 그들도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하여 추진계획이 급속도로 진행되어 김원벽은 연희전문학교 학생 이병주(李秉周)에게 알리고, 다시 회원 40명에게 알려 찬성을 얻었으며 대관원에 모였던 학생대표들은 각기 자기의 학교와 중등학교 학생들을 규합하여 이에 협조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개별적인 독립운동 추진계획이 통합 단일화되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의 인선이 시작되었다. 천도교 측에서는 이종일(李鍾一)·권병덕(權秉悳)·양한묵(梁漢默)·김완규(金完圭)·홍기조(洪基兆)·홍병기(洪秉箕)·나용환(羅龍煥)·박준승(朴準承)·이종훈(李鍾勳) 등 11명과 손병희·권동진·오세창·최린이 서명 날인하였고 그리스도교 측에서는 이승훈·양전백(梁甸伯)·오
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