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참여사진

국가보훈부(국문) - 참여사진 상세보기 -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제목, 내용, 파일 정보 제공
13.05■. 유관순 열사 유적(柳寬順烈士遺蹟).
작성자 : 송철효 작성일 : 조회 : 934
13.05■. 유관순 열사 유적(柳寬順烈士遺蹟). ●. 개 요. 유관순 열사 유적(柳寬順烈士遺蹟)은 사적 제230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 구 병천면 탑 원리에 위치하고 있다. 생가 넓이는 약 66㎡ 봉화지 개수는 1식이며 사적 넓이는 2.45㎡ 봉화지 개수는 1,600식이나 된다. 이곳은 유관순 열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1919년 03월 1일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 학생들과 서울에서 시위에 참가하였고 일본인들이 휴교령을 내리자 같은 해 03월 13일 고향인 병천으로 내려와 마을 사람들에게 서울의 3·1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함께 궐기할 것을 설득했다. 04월 01일(음력 03월 0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하여 만세운동의 횃불을 올렸던 곳으로 1972년 10월 14일 국가에서 사적지로 지정하였다. ●. 내 용. ▲. 1902. 3. 15 충남 천안~ 1920 서울 독립운동가 이화학당(梨花學堂) 재학 당시 3·1운동이 일어나자 아오내[竝川] 장터 시위를 주동하고 수감된 뒤에도 옥중 투쟁을 계속하다가 죽었다. 본관은 고흥(高興). 아버지는 중권(重權)이며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다. 1916년 기독교감리교 공주교구의 미국인 여자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입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5일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그뒤 총독부 임시휴교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 당하자 03월 08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고향에서는 이종성(李鍾成)이 주동이 되어 시위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구금당해 실행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주선으로 03월 09일 밤 예배가 끝난 뒤 조인원(趙仁元)·이백하(李伯夏) 등 2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사촌언니와 함께 서울의 상황을 설명하여 즉석에서 04월 01일(음력 3월 1일) 아오내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안성·목천·연기·청주·진천 등의 마을 유지와 유림계를 규합하기 위한 연락원으로 선출되어 20일 동안 수 백리를 왕복하며 시위운동에 참여할 것을 설득했다. ▲. 04월 01일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조인원의 선도로 시위가 시작되자 시위대 선두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시위 도중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자신은 주동자로 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 항소했으나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자 재판장에게 자신의 투쟁이 정당함을 역설하고 의자를 집어던져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인해 몸이 상했으나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에도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 때문에 더욱 혹독한 형벌을 당해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1920년 17세의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8·15해방 후 충청남도와 천안 군의 협력으로 병천면에 유관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건립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류 열사의 본관은 고흥(高興)류(柳)씨이며 중시조 류태우의 10대손으로 1902년 03월 15일 충남 천안군 동면 용두리 (현재 병천면 용두리 지령부락)에서 아버지 류중권씨와 어머니 이소제 여사의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남 열사의 부친은 일찍이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한 개화인사로서 가산을 털어 향리에 흥호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운동을 전개한 계몽운동자 류열사는 어릴 때부터 매봉교회 주일학교에 다닌 기독교신자로서 본래부터 총명하여 외국인 선교사가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 1919년 03월 01일 만 17세의 소녀 몸으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함. 일제의 휴교령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동년 03월 13일 독립선언서를 휴대하고 고향에서 아우내장날인 04월 01일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천안 연기 청주 지넌 등을 누비며 계획 03월 31일 매봉산의 봉화 불을 신호로 04월 01일 아우내 장터에서 수천 명이 모였고 열사께서 선봉이 되어 만세운동을 주도함 이 시위로 류열사의 부모를 비롯해 19명이 순국하였고 류열사도 부상을 입은 채 체포되어 공주감옥으로 송치됨. ●.결 론. 류 열사께서는 한국인으로 일본인에거 재판을 받을 수 없다. 고 항거하여 3년형을 받았으나 복심법원에서 법정모독죄로 가중 처벌되어 7년형을 선고 받고 08월 01일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 옥중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계속 부르시다 헤아릴 수 없는 폭행과 악독한 고문에 못 이겨 1920년 10월 12일 오전 8시 만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심 열사께서는 나는 죽일 수 있어도 우리나라 독립은 막을 수 없다. 너희들은 반드시 망하고야 말 것이다. 라는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목숨을 거두셨음 정부에서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 하였고 1972년 10월 14일에 봉화지와 생가지를 사적 230호로 지정 오늘에 이르고 있음 유관순 열사의 일생 1902. 3. 15 천안군 병천면 용두리 출생 1916. 3. 5 이화학당 보통과 입학 1919. 3 이화학당 고등과 입학 1919. 3. 1 3.1독립만세운동 참가 1919. 4. 1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일본관헌에게 체포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 구속 (수형번호 91번) 공주감옥으로 송치 1919. 8.1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법정모독죄 가중으로 7년 형) 1920. 10.12 수감중 옥중에서 고문에 순국 1920. 10.14 서울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 1962. 3. 1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추서. ●. 揭 載. 1. 國家報勳處 2. 國務總理室 3. 牧民 Forum 代表 4. 國防部 5. 保健福祉 家族部 6. 警察廳 7. 國政院 8. 全州市廳 9.傷痍軍警會 10. 武功 受勳者會 11. 6.25參戰 戰 友會 12. 獨立紀念館 13. 文化財廳 14. 全羅北道 道廳 15. 報勳敎育 硏究院 16. 戰歿軍警 遺族會 17. 戰爭 紀念館 18. 仁川大學 敎授 19. 益山市 嘉藍協會 理事 20. 全南大同財團 局長 21. 文化遺産 踏査會 Cafe' 22. 南原 崔明姬 文學會 理事 23. 大田顯忠院, 任實護國院 24. 全州市 圓佛敎 會長 25. 大韓民國 國家有功者會 26. 全羅北道 道廳 Monitor Cafe' 27. 越南 參戰 戰友會 28. 傷痍 軍警會 Cafe' 29. 南原 文化院 局長 30. 大韓民國 國家有功者 31. 國家有功者 廣場 32. 環境部 33. 其他 同僚입니다. 感謝 합니다! ●.2013년 03월 20일. 國家報勳處 알림이 및 諮問委員 龍湖 宋 哲 孝. ?
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