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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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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5■. 이봉창 의사.
작성자 : 송철효 작성일 : 조회 : 898
13.65■. 이봉창 의사. ●. 개 요. 이봉창(李奉昌, 1900년 08월 10일 ~ 1932년 10월 10일)은 日帝强占기의 한국의상인 항일 독립 운동가이다. 일본으로 건너가 상인 등으로 활동하다가 大韓民國 臨時政府가 있는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애국단원이 되었다. 경성부의 중류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가정 형편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상점 점원 철도청 견습생으로 일했고 일본으로 건너가 상점 점원과 막노동 등에 종사하였다. 1918년 철도국의 견습 사원이 되었으나 1년 후 조선인보다 늦게 입사한 일본인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에 분개하여 철도국을 그만두었고 1928년에는 일본 천황히로히토의 즉위식에 구경하러 갔다가 한글과 한문으로 된 편지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11일간 수감되었다. 조선인과 일본인을 차별하던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일본 정부에 항거하게 되었다. 1931년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한인거류민단을 통해 大韓民國 臨時政府의 김구를 찾아갔다. 능행에 오르던 천황을 눈앞에서 본 것을 밝히고 천황을 제거할 계획을 모의하였다. 1932년일본에 건너가 도쿄의 경시청 사쿠라다몬 (櫻田門) 앞에서 일본의 천황 히로히토 쇼와 부자를 폭탄으로 저격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일본식 이름은 기노시타 쇼조(일본어: 木下昌藏)이다. 본관은 전주이다. 경성부 출신. ●. 내 용. ▲. 1901. 8. 10 서울~ 1932. 10. 10. 독립운동가 본관은 전주. 아버지는 진규(鎭奎)이다. 용산 문창보통학교(文昌普通學校:지금의 효창초등학교)를 마친 뒤 가정형편상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1915년 일본인 상점점원으로 취직했다. 1918년 용산철도국 소속의 만선철도(滿鮮鐵道) 기차운전견습생으로 근무했다. 1919년 3·1운동을 목격하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스스로 서약했다. 1924년 11월 자기희생을 통해 민족과 국가의 독립을 성취시키겠다고 각오하고 적을 알기 위해서는 적지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형 범태(範泰)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사카[大阪]에서 철공소 직공으로 일하다가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로 이름을 바꾼 뒤, 도쿄[東京]·나고야[名古屋]·요코하마[橫浜] 등지를 전전하면서 일본어를 익히고 상점 점원, 철공소 직공, 잡역부, 일용살이 등을 하며 국내외 정세를 관찰하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가난과 병고 속에서 동지도 없이 혼자의 힘으로 대사를 도모한다는 것이 역부족임을 느끼고, 6~7년간에 걸친 일본에서의 긴 방황을 끝내고 독립운동가들의 집결지인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가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결단을 내린 그는 1931년 1월 상하이로 건너갔다. ▲. 상하이에 도착한 즉시 상하이 한인거류민단을 찾아가서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민단 간부들은 일본말과 한국말을 섞어쓰고 임시정부를 가정부(假政府)라고 일본식으로 부르는 등 그의 언행이 남다른 데 대해 의심을 품고 그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구(金九)의 주선으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한 뒤 일본 왕의 암살을 자원하여 1년 이내에 이를 실행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당장 거사자금이 없었으므로 상하이의 일본인 인쇄소와 악기점 등에서 일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재미동포로부터 자금이 도착한 데 이어 상해병공창(上海兵工廠)의 주임으로 있던 중국군 대령 김홍일(金弘壹)과 중국인 류즈[劉峙]로부터 수류탄 2개를 입수함으로써 거사 준비가 마무리되자, 1931년 12월 13일 안공근(安恭根)의 집에서 두 손에 수류탄을 들고 일본 왕 히로히토[裕仁]를 처단할 것을 선서했다. 수류탄과 거사자금 300원을 지니고 일본으로 떠나 이튿날 고베[神戶]에 입항한 그는 오사카로 옮겨 21일까지 머물다가 22일 밤 도쿄에 도착했다. 일본 왕 히로히토가 만주국 괴뢰황제 푸이[溥儀]와 도쿄 교외 요요키[代代木]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거행한다는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의 보도기사를 확인하고 상하이의 김구에게 관병식을 기회로 거사를 결행한다는 뜻을 알리는 암호전문을 타전했으며 요요키 연병장에서 거행된 예행연습을 미리 둘러보았다. 1932년 1월 8일 도쿄 고지마치 구[麴町區] 밖 사쿠라다몬[?田門] 앞에서 시민을 가장하여 기다리던 그는 오후 2시에 관병식을 마친 후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일왕의 행렬이 나타나자, 군중 속에서 달려나와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일왕이 탄 마차를 정확히 식별하지 못한 데다가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기수와 근위병에게 부상을 입혔을 뿐 일왕을 명중시키지는 못했다. 그 자리에서 품안에 있던 태극기를 꺼내 '대한독립 만세'를 3번 부른 뒤 체포되었다. 이봉창은 일본 경찰의 심문에 일체 불응한 가운데 예심조차 거치지 않고 진행된 그해 10월의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0월 10일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 결 론. 한인애국단의 첫 번째 거사였던 이봉창의 의거는 예상 밖의 파문을 일으켰다. 중국의 각 신문들은 한국인의 애국적 기개에 대해 매우 고무적으로 대서특필했으며 이에 격분한 일본 당국은 군경을 동원하여 중국 신문사를 습격했다. 또한 이 의거는 당시 침체상태에 빠져 있던 임시정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임시정부와 중국 정부의 항일협력 관계를 더욱 공고하게 해주었다. 일본은 이 의거의 영향으로 한층 거세진 중국의 항일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니치렌종[一蓮宗] 승려 살해사건을 빌미로 상하이사변[上海事變]을 일으켰다. 1962년 이봉창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揭 載. 1. 國家報勳處 2. 國務總理室 3. 牧民 Forum 代表 4. 國防部 5. 保健福祉 家族部 6. 警察廳 7. 國政院 8. 全州市廳 9.傷痍軍警會 10. 武功 受勳者會 11. 6.25參戰 戰 友會 12. 獨立紀念館 13. 文化財廳 14. 全羅北道 道廳 15. 報勳敎育 硏究院 16. 戰歿軍警 遺族會 17. 戰爭 紀念館 18. 仁川大學 敎授 19. 益山市 嘉藍協會 理事 20. 全南大同財團 局長 21. 文化遺産 踏査會 Cafe' 22. 南原 崔明姬 文學會 理事 23. 大田顯忠院, 任實護國院 24. 全州市 圓佛敎 會長 25. 大韓民國 國家有功者會 26. 全羅北道 道廳 Monitor Cafe' 27. 越南 參戰 戰友會 28. 傷痍 軍警會 Cafe' 29. 南原 文化院 局長 30. 大韓民國 國家有功者 31. 國家有功者 廣場 32. 環境部 33. 其他 同僚입니다. 感謝 합니다! ●.2013년 03월 20일. 國家報勳處 알림이 및 諮問委員 龍湖 宋 哲 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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