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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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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0■.홍주성(洪州城(朝陽門,衙門,安懷堂,余何亭).
작성자 : 송철효 작성일 : 조회 : 883
13.70■.홍주성(洪州城(朝陽門,衙門,安懷堂,余何亭). ●. 개 요. 홍주성은 백제의 주류성에 비교되고 있으나 초 축 년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고려시대까지도 홍주성 수 개축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세종실록지리지에서 홍주읍성의 둘레가 533보2척(1보는 6척) 성내에 샘이 하나 있는데 여름이나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 내 용. ▲. 그런데 조선 초기의 문물제도의 정비와 중앙집권체제의 표현이라 할 지방행정구역의 개편과 왕실의 대행자라는 명분에 힘입어 각 관읍의 위엄도 동시에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각 관읍의 읍성은 새로운 규모와 격식을 갖춘 성을 새로이 쌓게 되었는데 그 일환으로 문종 원년(1451)에 새롭게 수축한 홍주읍성의 규모는 성주 4,856척 높이 11척 여장이 608 성내에 우물이 2 작은 개울 1 해자는 시설하지 않았으며 본래보다 물려 쌓았다고 했다. 그 후 수축은 현종대에 한계수에 의하여 중수되고 순조 24년(1824)에 진장 김계묵과 목사 이헌규에 의해 수리되었는데 그런 사실을 수성기적비가 전한다. 또 고종 7년(1870) 목사 한응필이 조양문을 짓고 경의문 망화문과 관영을 경영하였다. ▲. 문종대에 이 성에 문이 4개가 있었으나 남문에는 문루가 없었던 것이 특징이다. 현재의 조양문은 고종 7년(1870)에 한응필의 개수로부터 비롯되나 1955년 새로이 수축 단장한 것이다. 또 홍주 아문은 朝鮮時代 관아의 구조나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는 출입문이다. 홍주읍성은 三國時代 이래 朝鮮時代까지 읍터로서 크게 변동이 없었다는 점과 내포평야를 끼고 있어 시대적으로 많은 사연을 갖는다는 점, 조선 초 새로운 축성법에 의한 축성물이 현존한다는 점에서 보존의 가치와 축성법 연구에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산성은 주위가 최장 1,772m에 달하였으나, 많은 구간이 전면 훼철되고 810m의 구간만이 남아있고 성내에 있던 관아의 건물이 36동에 이르렀으나 그 중 조양문 홍주아문 안회당(동헌[東軒]) 여하정(余何亭)등 4동의 건물만이 현존하고 있다. ●. 결 론. 조선후기 지리학자인 李重煥이 擇里志에서 지칭한 가야산 일대 10개 고을과 朝鮮王朝實錄에서 밝힌 홍주목(지금의 홍성)이 관할하는 20여 개 고을을 지칭하는 내포지역의 중심인 홍성의 홍성군청 뒤뜰에 가면 역대 홍주목사가 정무를 집행하던 동헌이 있다. 그러나 이곳만이 유일하게 동헌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안회당(安懷堂)이라고 불리고 있다. 건물 중앙에 거는 편액(扁額)의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하사 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안회는 노인을 평안하게 모시고 벗을 믿음으로 하여 아랫사람을 사랑하여야 한다. 는 뜻이라고 한다. 22칸의 목조 기와집으로 조선 숙종4년(1678)에 처음 지어졌고 고종7년(1870) 한응필 목사(牧使)가 개축하였다고 한다. 여하정은 이 안회당 뒤뜰에 있는 작은 연못에 세워진 정자다. 작은 규모의 정자이지만 고목과 연못의 정취가 어우러져 한 폭의 아름다운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고종33년(1896) 이승우 목사가 옛 청수정 자리에 세운 것으로 역대 홍주목사들이 관아를 돌보다가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는 여하정은 우리 선조들의 멋을 한껏 엿볼 수 있다. 아직은 날씨가 쌀쌀하지만 싱그러운 봄날 아이들과 함께 주말에 역사교육도 시키며 사진촬영을 하면 좋을 그런 장소다.?홍주성은 안회당과 여하정을 에워싸고 있는 성으로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800m 가량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분이 남아있다. 처음 지어진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 홍주성의 둘레와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홍성은 충절의 고장답게 성곽주변의 토지를 잔디밭을 조성하고 애국지사들의 흉상을 곳곳에 만들어 놓았다. 충청남도 서북부에 자리한 홍성군은 해안선을 연접한 서해의 관문이자 예로부터 국방의 요새일 뿐 아니라 서북부 일대의 교통중심지이다. 백제,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는 동안 홍주성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산성(山城)과, 인접한 해미의 성 등을 보아 홍주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왜구의 침입이 예상되는 고을의 읍성을 새로운 격식에 맞추어 쌓게 되었던 조선 세종 때에 처음 쌓기 시작하여 문종 1년(1451)에 새로 고쳐 쌓았다. 당시 성의 규모는 둘레가 4,856척(약 1.5㎞), 높이는 11척(약 3.3m)이며 문은 4개가 있었고, 여장?적대 등의 여러 시설이 설치되었으며 안에는 우물 2개가 있었다고 한다. 동문인 조양문은 현재까지 남아있고 1975년 복원한 것이다. ●. 揭 載. 1. 國家報勳處 2. 國務總理室 3. 牧民 Forum 代表 4. 國防部 5. 保健福祉 家族部 6. 警察廳 7. 國政院 8. 全州市廳 9.傷痍軍警會 10. 武功 受勳者會 11. 6.25參戰 戰 友會 12. 獨立紀念館 13. 文化財廳 14. 全羅北道 道廳 15. 報勳敎育 硏究院 16. 戰歿軍警 遺族會 17. 戰爭 紀念館 18. 仁川大學 敎授 19. 益山市 嘉藍協會 理事 20. 全南大同財團 局長 21. 文化遺産 踏査會 Cafe' 22. 南原 崔明姬 文學會 理事 23. 大田顯忠院, 任實護國院 24. 全州市 圓佛敎 會長 25. 大韓民國 國家有功者會 26. 全羅北道 道廳 Monitor Cafe' 27. 越南 參戰 戰友會 28. 傷痍 軍警會 Cafe' 29. 南原 文化院 局長 30. 大韓民國 國家有功者 31. 國家有功者 廣場 32. 環境部 33. 其他 同僚입니다. 感謝 합니다! ●.2013년 03월 20일. 國家報勳處 알림이 및 諮問委員 龍湖 宋 哲 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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