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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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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6■.전라북도 김제출신 독립운동가 정화암(鄭華岩)선생!
작성자 : 송철효 작성일 : 조회 : 913
13.76■.전라북도 김제출신 독립운동가 정화암(鄭華岩)선생! ●. 개 설. ▲. 일 자 : 2013년 04월 09일. ▲. 장 소 : 전북 김제시 금산사 입구. ▲. 주 최 : 國家報勳處. ▲. 주 관 : 國家報勳處 알림이 및 諮問委員. ▲. 목 적 : 愛國精神 涵養. ▲. 직 책 : 獨立運動家. ▲. 사 진 : 添附 하였습니다. ▲. 작 성 : 國家報勳處 알림이 및 諮問委員. ●. 개 요. 1896∼1981 獨立運動가 일명 윤옥(允玉)·현섭(賢燮) 全羅北道 김제출신 1919년 3·1운동 때 향리에서 示威運動에 參加하였고 1920년 극동을 시찰하는 미국의원단의 한반도 방문 때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건의하려다 日本警察에 쫓기게 되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8년 이회영(李會榮)·신채호(申采浩) 등과 교유하여 조국광복운동은 혁명적 무력투쟁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협의한 뒤 중국국민혁명의 원로 리스쳉(李石曾)·우중후이(吳鍾暉) 등과 제휴 동방자유혁명자연맹(東方自由革命者聯盟)을 조직하여 활동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930년 04월 20일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과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여 직접적인 무력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재중국무정부주의자 유기석(柳基石)을 만나 유자명(柳子明)·장도선(張道善)·정해리(鄭海理) 등과 함께 활동하던 중 1931년 01월 원심창(元心昌)이 상해에 오게 됨을 계기로 조직을 강화하고 상해일대에서 친일배 및 전향자 등을 색출 사살하여 民族精氣를 바로잡고 독립운동에 일대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 내 용. ▲. 1933년 03월 이강훈(李康勳)·원심창·백정기(白貞基)·유기문(柳基文)·이용준(李容俊)·진수방(陳樹芳)·전화민(田華民) 등과 규합 상해해방연맹(上海解放聯盟)을 결성하였다. 1933년 03월 중순 일본 주중(駐中)상해공사 아리요시(有吉明)가 중국 유력자를 육삼정(六三亭)에 초청하여 연회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본공사를 사살하려고 계획하였으나 밀정의 보고로 거사 직전에 잡혔다. 1936년 국내 호서은행(湖西銀行)에서 탈취하여 온 5만7000원을 기금으로 기관지 남화통신 南華通信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별동대 맹혈단(猛血團)을 편성하는 한편 중국 항일운동세력과 연합하여 중한청년연합회(中韓靑年聯合會)를 조직하였으며 항쟁시보 抗爭時報를 발간하였다. 1940년부터 푸젠성(福建省)내에서 이강(李剛)과 함께 광복 때까지 광복군 활동의 현지 책임자를 지냈다. 특히 이때 일본군의 수송로에 잠복하였다가 이를 폭파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한편으로는 생포된 연합군의 포로를 구출하는 공작에도 공헌하였다. 또한 일본군내의 한국인 학도병 탈출공작도 아울러 전개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4·19의거 후 통일사회당 정치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8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습니다. ▲. 獨立運動家 일명 윤옥(允玉)·현섭(賢燮)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고 1920년 미국의회 사절단이 내한했을 당시 일본의 침략상과 학정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자 다음해 10월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했다. 1924년 이회영(李會榮)·신채호(申采浩) 등과 교유하면서 무력투쟁에 의한 독립운동을 주장 폭탄제조 기술을 습득하고 군자금확보 방안을 강구했다. 1928년 안공근(安恭根)·이정규(李丁奎)·한일원(韓一元)·이을규(李乙奎) 등과 중국에서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맹하여 활동했으며 機關誌 탈환 奪還을 발행하여 武裝 抗日鬪爭을 촉구했다. 1930년 04월 신현정(申鉉鼎)·최석영(崔錫榮) 등이 천안 호서은행에서 자금을 가져오자 유자명(柳子明)·이달(李達)·이하유(李何有)·오면직(吳冕稙) 등과 함께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 상해부를 조직했으며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하여 본격적인 무력항쟁을 도모했다. 또한 중국 무정부주의자의 거두인 장도선(張道善)·정해리(鄭海理) 등과 함께 활약하던 중 1931년 01월 원심창(元心昌)이 상하이[上海]에 오는 것을 계기로 이중현(李中鉉)·유자명과 함께 조직을 강화하고 상하이 등지에서 친일배와 전향자 등을 색출하여 암살 대상으로 지목·결정하고 동지들에게 실천하게 했다. 이해 11월에는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을 구성원으로 흑색공포단(B.T.P)을 조직하여 일본영사관과 병영에 폭탄을 던지는 등 무력항쟁을 계속했습니다. ●. 결 론. 1933년에는 이강훈(李康勳)·원심창·백정기(白貞基)·유기문(柳基文)·이용준(李容俊)·진수방(陳樹芳)·전화민(田華民) 등 간부들을 규합하여 상해해방연맹을 결성하여 활동했다. 이해 3월에는 중국 주재 일본 상해공사인 아리요시(有吉明)가 중국의 유력인사 100명을 무창로(武昌路) 육삼정(六三亭)에 초청하여 연회를 베푼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원심창·이강훈·백정기에게 무기를 주고 아리요시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중 일본 밀정의 밀고로 거사 직전 백정기·이강훈이 체포되었다. 1936년 01월부터 남화연맹의 기관지 남화통신 南華通信을 매월 발간해 항일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별동대 맹혈단(猛血團)을 조직해 무력투쟁을 하도록 했다. 1937년 09월에는 중국인 무정부주의자를 규합하여 중한청년연합회를 결성하는 한편 항쟁시보 抗爭時報를 발간하여 한·중 양 국민의 공동투쟁을 도모했다. 이후 임시정부의 시책에 협조하여 이를 지원했으며 1940년부터는 이강(李剛)·신정숙(申貞淑)·전복근(全福根)·강치명(姜治明) 등과 함께 상하이 방면에서 잠복·활동하며 광복군의 현지책임자로서 주중 미공군에 미·영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를 확인·보고하는 등 정보활동에 기여했다. 8·15해방 후 귀국했으며 4·19의거 후 통일사회당 정치위원으로 활동했다. 1983년 建國勳章 國民章이 추서되었습니다. 感謝 합니다! ●. 揭 載. 1. 國家報勳處 2. 國務總理室 3. 牧民 Forum 代表 4. 國防部 5. 保健福祉 家族部 6. 警察廳 7. 國政院 8. 全州市廳 9.傷痍軍警會 10. 武功 受勳者會 11. 6.25參戰 戰友會 12. 獨立紀念館 13. 文化財廳 14. 全羅北道 道廳 15. 報勳敎育 硏究院 16. 戰歿軍警 遺族會 17. 戰爭 紀念館 18. 仁川大學 敎授 19. 益山市 嘉藍協會 理事 20. 全南大同財團 局長 21. 文化遺産 踏査會 Cafe' 22. 南原 崔明姬 文學會 理事 23. 大田顯忠院, 任實護國院 24. 全州市 圓佛敎 會長 25. 大韓民國 國家有功者會 26. 全羅北道 道廳 Monitor Cafe' 27. 越南 參戰 戰友會 28. 傷痍 軍警會 Cafe' 29. 南原 文化院 局長 30. 大韓民國 國家有功者 31. 國家有功者 廣場 32.環境部 33. 其他 同僚입니다. 感謝 합니다! ●. 2013년 04월 09일. 國家報勳處 알림이 및 諮問委員 龍湖 宋 哲 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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