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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全羅北道 6.25戰爭 63週年 追念行事 擧行!
작성자 : 송철효 작성일 : 조회 : 806
97■. 全羅北道 6.25戰爭 63週年 追念行事 擧行! ●. 槪 說. ▲. 日 字 : 2013年 06月 25日. ▲. 場 所 : 全羅北道 敎育文化會館. ▲. 主 催 : 全羅北道 在鄕軍人會. ▲. 主 管 : 全羅北道, 6.25參戰 遺功者會, 在鄕軍人會. ▲. 人 員 : 政府 各 機關 및 報勳團體 總 300여명. ▲. 날 씨 : 흐리면서 무더운 날. ▲. 寫 眞 : 添附 하였습니다. ▲. 作 成 : 國家報勳處 알림이 및 諮問委員. ●. 槪 要. 어느덧 63년을 맞이한 同族相殘 悲劇의 그날 1950년 06월 25일 새벽 04 시경 中華人民共和國의 마오쩌둥과 Soviet Union의 Joseph Stalin 지원을 받은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이 Soviet Union에서 만든 Tank로 38선 을 넘어 남침해왔습니다. 오전 09시경에는 개성 防禦線을 격파하고 당일 오전 에 동두천과 포천을 함락시켰다. 26일 오후에 의정부를 27일 정오에는 이미 서울 도봉구의 창동 防禦線을 넘고 있었다. 창동 防禦線이 뚫린 大韓民國 국군은 강북구의 미아동에 있는 미아리 고개에 미아리 防禦線을 構築 하였으나 조선인민군의 전차에 의해 붕괴되었다. 28일 새벽 02시 30분 에는 한강에 있던 漢江大橋가 폭파되었고 이후 서울에는 共産軍이 주둔 하였다. 07월 14일에는 大韓民國 國軍의 指揮權이 美軍에게 넘어갔다. 大韓民國 政府는 大田에서 大邱를 거쳐 釜山까지 이전했습니다. 아 ~ 6.25전쟁! 그 날을 되새기며 우리 全羅北道 道民 300名은 全羅北道 道知事님과 함께 中央聖堂에서 全羅北道 敎育文化會館까지 市街行進을 시작으로 오늘의 行事를 擧行하였습니다. ●. 內 容. ▲. 개 회 : 11:30. ▲. 국 민 의 례. ▲. 표창 장 수여. ▲. 대 회 사 : 전라북도 도지사. ▲. 기 념 사 : 전라북도 도지사, 교육감, 보훈청장, 6.25회장, 재향회장. ▲. 결의 문 낭독. ▲. 6.25노래합창. ▲. 만 세 삼 창. ▲. 閉 會. ▲. 1950년 09월 15일에는 仁川 上陸作戰으로 같은 해 09월 28일에 洛東江 防禦線을 넘었고 10월 19일에는 朝鮮民主主義 人民共和國의 수도 平壤에 다다랐으나 中華人民 共和國 軍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었으며 그 와중에 居昌良民虐殺事件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1953년 07월 27일에는 休戰線을 중심으로 休戰協定이 체결되었고 한국 전쟁은 원칙적 으로 현재까지도 존속되고 있다. 3년1개월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숨지거나 다치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等 양국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 결과로 남북 간에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팽배 하게 되었다. 작은 전쟁(1950년 06월 25일): 38선 부근에서의 국지적 무력 충돌이 계속됨 제한 戰爭(1950년 06월 25일 ~ 1950년 07월 01일): 朝鮮 民主主義人民共和國이 大規模 무력 동원을 통해 大韓民國)의 수도 서울을 전격 침탈하여 불법으로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함. 전면 전쟁(1950년 07월 01일 ~ 1950년 10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大隊規模의 美軍 Smith部隊가 참전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은 07월 01일부로 전시국가총동원령을 발령함. 확대 전쟁(1950년 10월 ~ 1951년 06월): 仁川上陸作戰의 성공 후 UN연합 군은 서울을 수복함. 이후 항복을 재차 권고했으나 대답이 없어 국군이 최초 로 38선을 넘어 북진 시작 곧 國際聯合軍도 진격시작 평양수복 압록강 까지 진격했으나 중국 인민해방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었습니다. 고착 전쟁(1951년 06월): 중국 인민해방군의 2차례에 걸친 공세를 막아내고 연합군의 막강한 화력에 공산측이 停戰協定을 받아들임. ●. 결 론. 6.25전쟁으로 미군은 약 54,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거창 양민학살 사건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60만 명이 전쟁 中에 死亡하였고 전체 參戰國의 死亡者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의 死亡者는 백여만 명이 넘으며 그중 85%는 민간인이다. 또한 미군에 의해 避難民들이 학살당 한 노근리 학살사건 거창 주민들이 조선인민군 부역자로 몰려 학살당한 거 창 민간인 학살사건 한국군의 대표적인 전쟁 범죄인 보도연맹 사건 산청·함 양 양민학살 사건 강화 양민학살 사건 대중선동으로 조선인민군들이 우파들 을 죽인 소위 人民裁判 等의 전시 민간인 학살피해자 즉 전쟁 범죄 피해자 들도 발생했다. 이러한 민간인 피해 및 戰爭犯罪 事件의 규모는 최근에 공개 된 것이다.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과 國民防衛軍 사건은 李承晩 政權의 평판 을 크게 실추시키는 실정으로 비판받았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韓半島 전체 가 폐허가 되었으며 특히 일제가 만들어 놓은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지역 의 대규모 공업지역은 융단폭격을 당해 완전히 소실되었다. 한강의 다리는 모조리 끊어졌으며 수많은 전쟁고아가 양산되었다. 전쟁을 통해 大韓民國은 미군의 주둔과 미국의 經濟的 지원으로 軍事的·經濟的 토대를 구축할 수 있 었고 나라를 지키기 위한 反共精神이 涵養되었습니다. 1. 국가보훈처 현충시설통합정보 알림이 2. 국가보훈처 열린마당 국민광장 참여사진 3. 국무총리실 자유게시판 4. 무공수훈자회 소통마당 자유게시판 5. 상이군경회 컴뮤니티 자유게시판 6. 카페 전북도청 신명이 모니터 7. 카페 전북도청 행정 정보 공개 단 8. 카페 Pride 여산, 여산인 9. 카페 옛 그늘 문화유산 10. 국방부 국민 공감 나도 한마디. ●.2013年 06月 25日. 國家報勳處 알림이 및 諮問委員 龍湖 宋 哲 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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