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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 하시다 경성형무소서 옥사-上
작성자 : 정병기 작성일 : 조회 : 1,073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 하시다 경성형무소서 옥사-上 2014년 03월 02일(일) 19:00 [경안일보] ↑↑ 정 병 기 - 칼럼니스트 ⓒ 경안일보 증조부님 정용선 선생의 경성형무소 수형기록이나 옥사기록 재판관련 자료를 요청하오니 관심 가져 주시길 바랍니다. 올해는 8.15 해방을 맞은 광복 68주년이자 3·1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난 지 94주년이다. 그러나 미발굴독립유공자의 명예를 드높이고 그 후손들의 한 풀어주어야 할 중요한 때이지만 해결되지 않은 요연한 현실로 답답하기만 하다. 정부 당국은 미발굴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에 대하여 최소한의 예우와 조치가 있어야 하며 이는 선열에 대한 기본적 예의다.방치된 미발굴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 지금도 가슴치고 눈물 흘리고 있다는 사실 알아야 합니다. 올해가 건국 61주년이자 광복 제65주년을 맞으며 3·1운동 제91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이다. 여기저기서 행사계획과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지만, 문제는 많이 남아있다. 진정으로 대한민국의 친일문제가 청산되었는지와 진정한 광복과 해방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3·1 민족정신의 계승과 과거사는 반드시 제대로 정리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대충 덮어놓고 잘해보자는 식의 과거사 정리는 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이는 애국선열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본다. 암울했던 민족의 암흑기인 일제 강점기에 나라의 주권을 되찾으려고 동분서주하신 애국선열과 미발굴독립유공자들에 대한 넋을 기리고 그들을 위한 나라 잃은 국민의 독립운동과 민중봉기를 일으킨 항일독립정신을 높이 기리고 평가하며 재정립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현재까지 독립운동가 자손들의 상당수가 배움의 길에서 멀어진 지 오래고 가난 때문에 먹고 사는 일에 매달려야 하는 형편이다. 일제강점기하에서는 독립운동가의 가족이란 이유로 감시와 멸시 그리고 온갖 천대와 모진 박해를 받으며 살아야 했는데 지금도 힘겹게 사는 자손이 많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조상이나 선조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여유가 없다. 오늘도 일부 자손들이 관련 자료발굴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많은 자료가 소실되거나 소각처리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난 이후라 찾기란 매우 어려운 현실이 되고 말았다. 독립운동 관련 문서는 역사적 문서로 반영구적인 보존서류임에도 그 중요성이 인식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고 개탄스럽다. 후손들이 자손된 도리 다하지 못해 가슴치며 눈물 흘리는 눈물은 한이 맺인 피눈물이라는 사실이다. 몇몇 자손들이 조상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거증 자료를 찾아 동분서주하지만, 관련 자료는 누군가에 의해 없어지거나 6·25전쟁 중에 사라진 경우가 많다. 자손들이 자력으로 찾을 수 있는 자료는 그저 전해오는 말이거나 제정 호적에 형무소 수형기록이 있는 것이 전부이다. 그럼에도, 해당부처인 국가보훈처에서는 독립유공자임을 인정받아 명예회복을 하고자 하는 후손들에게 상세한 거증 자료나 수형인 명부나 당시의 재판서류 등 무리한 자료를 요구하는 현실이다. 이제는 후손들에게 자료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정부가 가족들에게 아님을 반증하는 자료를 내 놓아야 하지 않을까 반문하고 싶은 심정이다. 더 늦기 전에 이제는 국가가 직접 나서고 서둘러야 독립유공자 후손들에 대한 예우를 국가가 마땅히 나서야 하지만 오늘날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다는 게 8·15 광복절이나 3·1절 행사에서 애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위해 묵념하는 게 전부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일회성 겉치레 행사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영혼을 편히 쉬게 할 수 있는지 반문하고 싶다. 그리고 시신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영혼들이 눈도 못 감고 구천을 맴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저승에서라도 그들의 자손들이 이렇게 돌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구천을 맴도는 혼령 자신도 아마도 가슴을 치고 통분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3·1절이나 8·15 광복절이 진정한 민족의 광복절이 되도록 하려면 3·1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친일역사 청산과 독립유공자 발굴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더불어 해외의 관련자료 수집을 위한 노력도 절실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독립운동가 명예회복과 자손들에 대한 관심이 급선무이며, 이제는 후손들에게만 맡겨 놓을 것이 아니라 정부가 앞장서 부처 간 유기적이고 과학적인 자세와 노력으로 자료발굴을 진행해야 한다. 이제 91여 년이 흐른 현재 경성형무소에서 오로지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위해 일제와 투쟁하다 해방을 맛보지 못한 채, 한 많은 생을 마감한 미발굴독립운동가들에게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져 하루빨리 명예가 회복되고 예우의 길이 열리기를 간절히 바라며 나라가 어려울 때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되는 자세와 노력이 뒤따르게 되기를 아울러 바라고 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하여 35년이 지난 장년의 나이가 된 국가유공자입니다. 저의 사연을 다시 보내오니 한번 살펴 주시고 저의 소망인 증조부 명예회복이 될 수 있게 도움을 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국민적인 관심과 공감대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정부당국은 자료가 전쟁이나 그 이후 정부가 관보나 행정명령으로 소각하거나 폐지하여 놓고 수형자료 없다고 미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선조의 명예회복을 거절하는 현실에 대하여 매우 유감스럽고 안타깝게 생각한다. 지금도 미발굴독립유공자들의 잊혀진 명예를 찾기 위해 갖은 고생과 노력을 경주하며 떠 다가오는 제65주년 광복절을 맞는다. 지난 35년간 증조부의 항일운동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정병기(정용선의 증손자 /경성형무소 옥사자)는 나홀로 외로운 투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올해로 광복 65주년을 맞았지만 과거사 정리 작업은 여전히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홈페이지관리자 기자 . “언론사 & 단체 명훈” - Copyrights ⓒ경안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 하시다 경성형무소서 옥사-中 2014년 03월 03일(월) 20:16 [경안일보] ↑↑ 정 병 기 - 칼럼니스트 ⓒ 경안일보 <전호에 이어> 현재 독립적 국가기구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전 후, 광복 후 권위주의 통치 시까지 항일독립운동과 해외동포사, 민간인 집단 희생 등의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을 진행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실질적인 성과는 기대에 못 미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역대정권마다 과거사 문제는 가장 껄끄러운 문제로 치부되거나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현 정권에서도 친일인명명단 공개와 관련해 “친일문제는 공과를 균형 있게 봐야한다”한다거나 대일관계에서도 실리외교를 표방하며 “일본에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발언하는 등 과거사 정비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내비쳤다. 이처럼 과거사 정리 작업이 걸음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친일파들은 여전히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반면 일제강점기 시대에 항일운동을 했던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은 그 공을 인정받지 못한 채 과거 속에 묻혀 있다. 그러나 정부가 이들을 외면하는 동안에도 미발굴독립유공자들의 행적을 찾기 위해 남은 그 후손들은 자료가 있을만한 고이면 어디든지 찾아다니며 추적하고 있다. 저의 증조부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시다 옥사하셨지만 근거자료가 부족해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정씨는 근거를 찾기 위해 30년째 노력을 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정씨는 증조부의 독립운동을 증명하기 위해 애써왔지만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독립운동가에 대한 증빙자료 발굴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공여방송인 KBS1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호소도 해본바 있다. 정병기(53)는 증조부인 정용선 선생의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이 잡듯 뒤져 경성형무소(현 서대문형무소)에 옥사했다는 기록이 담긴 호적을 비롯한 관련 자료를 찾아냈고 주변인들의 증언을 확보했지만 국가보훈처는 미흡하다고 하며 거증자료를 요구하고 있는 현실이다. 증조부는 일제시대 군자금 모금 벌이다 경성형무소에 투옥돼 숨졌다. 제정호적과 주변인들 증언 등 항일운동 행적 드러났음에도 보훈당국은 외면… 수형인 명부 정부에 의해 소각돼” 분개하고 있다. 증조부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군자금 모금 운동을 한 혐의로 악명 높은 경성형무소에 투옥돼 숨을 거뒀다. 이는 일본형무소장인 일본인이 제정호적에 형무소 옥사내용이 기록돼 있다. 증조부로 인해 우리 집안은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았고 이를 견디다 못한 일가족들이 그의 이름을 족보에서 파냈고, 증조모를 개가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곧 발각돼 증조모는 굶어 죽었고, 조부는 탄광에서 일하다 폐병으로 사망했다. 아버지는 머슴살이를 전전하다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등 기구한 인생을 사셨다. 제정호적과 주변인들의 증언 등 증조부의 항일운동 사실이 명명백백한데도 보훈당국은 구체적인 죄목이 적힌 수형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지난 35년을 하루 같이 증조부의 항일행적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해온 정병기는 “광복 69주년이 무색할 만큼 항일운동을 했던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발굴작업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독립 운동가들의 모든 자료를 보존하고 발굴하는 것은 국가의 몫인데 그 자손들에게 독립운동 사실을 직접 입증하라고 하는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라고 성토하고 있다. 정용선의 증손자는 증조부의 명예회복에 이처럼 발 벗고 나서는 것은 다분히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그는 경찰관으로 복무하던 중 1980년 강도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칼에 찔려 국가유공자인 상이군경회원으로 연금을 받고 있다. 더욱이 증조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된다 하더라도 증손자인 자신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없다. 정병기는 “증조부님의 행적을 찾아다니면서 보상금 때문이라는 둥, 미쳤다는 둥 오해를 많이 받았다”고 그간 마음고생을 많았다. 그는 “솔직히 경제적으로 힘들게 사신 아버지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궁극적인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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