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참여사진

국가보훈부(국문) - 참여사진 상세보기 -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제목, 내용, 파일 정보 제공
광복71주년, 잃어버리고 버림받은 애국, 정부가 나서 바로잡아야
작성자 : 정병기 작성일 : 조회 : 521
광복71주년, 잃어버리고 버림받은 애국, 정부가 나서 바로잡아야 광복 제71주년인데 … 독립운동가 후손 정병기씨 38년째 ''고투''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 나라위해 목숨 받치고도 잊어지고 잃어버린 빛이 바랜 애국으로 전락 하다니? 잘못되고 왜곡된 역사를 지금 바로잡지 못한다면 정말 큰일이라고 본다. 비록 힘들고 어렵게 살아간다 해도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의 소원은 나라위해 목숨을 받치신 증조부님의 명예를 찾아 바로 세워 자손 된 도리를 다하는 일이다. 일제강점기 증조부 항일독립운동 나서고 집안은 풍비박산 나고 후손들은 고향 떠나 머슴살이전전 가난은 달고 살아야 했다. 나라가 추슬러지고 잘살면 살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아 나라위해 목숨을 받치고도 별것 없구나 하는 생각이 자꾸만 머리에 떠오른다. 일제시대 경성형무소(현 마포 공덕동 서울서부지방법원 검찰청)에서 옥사한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국가를 상대로 35년째 지루하고 고독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정병기(59)씨. 그는 ‘광복 제71주년’인 올해도 어김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다.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단서만 있다면 만사를 제쳐두고 어느 곳이든 달려간다. 부양할 가족도 있고 몸도 성치 않지만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증조부와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았을 조상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만 둘 수 없다. 정용선의 증손자 정병기의 “아버지와 친척 등의 증언을 종합하면 증조부인 정용선(1883년생) 선생은 1900년대 초부터 1916년까지 고향인 경북 봉화군을 중심으로 독립군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가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그런 자료들이 듣던 대로 들은바 대로 증손자가 오랜 세월 발굴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후손들이 해야 하는 현실도 참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증손자 정병기 말에 따르면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친일파의 집을 털고 일본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위험천만한 활동을 서슴지 않았다는 그의 증조부는 1916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고 10년 가까이 지난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통지서 한통만 날아왔다. 정병기 증손자는 “당시 반일 활동가를 가두던 경성형무소에서 장기복역하다 숨졌다는 것 자체가 증조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희생됐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또 증조부로 인해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자 이를 견디지 못한 일가친척들이 증조부 이름을 족보에서 파버렸고 증조부가 실종된 후 일제의 화가 미칠까 두려워한 가족들이 나서서 증조모를 개가시켰다는 사실은 독립운동을 했음을 뒷받침하는 명백한 ‘정황증거’라고 강조했다. 실제 호적등본을 보면 증조모는 독립투사의 아내였던 것을 감추기 위해 본명인 ‘박열이’에서 ‘정열이’로 개명까지 했다. 결국 그 이후 인동 장씨 개가집안은 몰락하고 말았다. 그런 호적들을 찾아 뒷받침하는 자료로 구가보훈처에 제출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일제가 만든 호적에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병으로 사망했다는 기록 외엔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서류는 남아있지 않다. 독립운동하면 삼대가 망하다는 말은 정말 진실이고 현실이다. 내가 지난 38년을 경험하고 체험해보니 그렇다고 본다. 나라위해 목숨을 받치신 고인들이 없다고 홀대를 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본다. 지난 38년 동안 증조부의 명예를 찾기 위해서라면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국가보훈처는 물론 국가권익위원회 청와대에까지 서류를 안 내밀어 본 곳이 없지만 ‘객관적인 입증자료가 없어 독립유공자로 선정할 수 없다’는 답변뿐이었다. 그는 국내에서 안 되면 외국에서라도 찾아보자는 생각에 1993년 미국 의회도서관에 편지를 띄워 수형인 명부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 마이크로필름 500장을 200달러를 주고 사오기도 했다. 일본 외무성에 수차례 서신을 띄우기도 했지만 안타깝게 결정적인 사료를 찾는 데는 실패했다. 지난해엔 국가를 상대로 행정소송까지 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종손자 정병기는 “일제강점기시대 형무소 수형인 기록을 지난 80년 12월 실수로 모두 불살라버렸던 정부가 이제 와서 독립운동으로 수감됐다는 걸 증명할 문서를 가져와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준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더욱이 일본 외무성은 1995년까지 조선인 수형인 명부를 보관했지만 우리 정부는 단 한 번도 그 서류를 요청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증손자 정병기는 친 할아버지 정덕수는 탄광에서 일하다 폐병으로 숨졌다. 정씨 자신은 경찰관으로 근무하던 지난 1980년 강력범을 현장에서 붙잡고 부상을 당했다. 당시 후유증에 간경화로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다. 나라를 위하는 일은 몸을 아끼고는 절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재삼 강조하지 않아도 애국선열의 모습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고 본다. 정용선 선생의 증손자는 “독립운동가를 찾는 일을 후손들에게만 떠넘기는 정부가 야속하지만 어디엔가 분명히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있을 거라 믿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뒤 늦은 감이 있지만 마포 경성형무소 옥사자를 발굴과 그 명예를 찾아주는데 앞장서야 하며 그 후손들의 가슴에 멍이 들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악명이 높던 마포 공덕동 소재 경성형무소를 복원하든가 역사관이라고 건립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친 항일독립투사와 애국선열 그리고 미발굴독립유공자의 나라사랑 정신과 자세를 보고 교훈을 삼을 수 있게 역사의 현장을 만드는데 주저하지 말고 서둘러 주기를 아울러 바라며 국민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사실 대로 알려 주기를 거듭 바라고 당부하고자 한다. 정부는 이제라도 뒤늦은 감 있지만 나서 바로잡고 바로 세워 후세에 올바른 역사를 전하는데 최선을 다하게 되기를 아울러 바란다. 글쓴이/ 정병기< 미발굴독립유공자 후손>
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