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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서부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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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내 학회의 역사-의암학회
부서 보훈팀
1970년 춘천에 오기 전에 춘천 출신으로 13도의 병도총재를 지낸 항일운동의 지도자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선생의 문집은 보지 못하였다.

당시 춘천의 많은 사람이 류인석 선생을 장군이라 부르며 무인으로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의암 선생은 방대한 양의 문집을 가지고 있었으나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아 화서학통의 마지막 인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적었고 의병총재로 더 알려졌기에 무인으로 연상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필자가 의암 선생을 비롯한 성재(省齋) 류중교(柳重敎) 선생, 중암(重庵) 김평묵(金平默) 선생 등 조선조 후기 춘천 중심의 일군의 화서(華西)학통의 선비들을 안 것은 대학 3학년 여름방학 때 당시 고려대학 총장이던 현상윤(玄相允) 선생의 저서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를 읽고서다.

이 책 후미에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운동과 그 대표자"라는 절에 이들을 거명하며 그 저서와 사상적 줄기를 기록한 것이 있다.

또 전고대방(典故大方)의 사통록에도 화서학파의 마지막 승계자로 의암 선생이 등재되어 있다.

이런 탓으로 의암 선생은 화서학통의 마지막 선비이고 지금 춘천에 건립되어 있는 선생의 동상도 칼을 쥐고 있는 장군의 상이 아니고 전형적 선비의 상을 하고 있다.

1976년에 강원도 인물을 주제로 한 논문을 써서 도에서 발표를 해달라고 해 잡은 주제가 의암 선생이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의암 선생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생각에 이 기회에 선생을 선양하고자 주제로 택해 도청에서 발표를 했다.

대개 이러한 행사에 지사는 인사말을 하고 자리를 뜨는 수가 더러 있는데 당시 박종성(朴鍾聲) 지사는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발표가 끝나자 점심을 같이 하자면서 “도는 지난해 강릉에 사임당 동상을 건립했고 춘천에 인물이 없을까 숙제로 삼아 왔었다.

그런데 최 교수의 발표를 들으니 이 숙제가 풀린 듯하다.

동상을 세워도 될 만한 인물이지요”라고 물었다.

필자가 “의암 선생은 춘천이 고향으로 동상을 세우고도 남을 만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동상제막식 때는 강원도 사람만으로 하지 말고 광복회본부와 성균관, 한국유도회에 그 취지를 알리고 초청을 해 전국적 행사로 해야지 뒷말이 없을 것이니 꼭 유념하십시오”라고 조언을 했다.

동상건립위원회가 조직되어 그때의 위원들의 명단이 동산 뒤편에 기록되어 있다.

의암 선생의 사진의 유무는 알 수 없으나 다행히 영정이 있어 선생의 손자인 류준상씨가 위원회에서 공개해 그것을 대본으로 동상을 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지금의 동상은 영정 그대로이며 복식도 그대로이다.

동상 제작은 춘천교대의 이길종 교수가 맡았다.

동상 건립 장소가 문제가 되어 처음에는 지금의 항몽순의비(抗蒙殉義碑) 자리까지 논의가 되었으나 1976년에 에티오피아 건물 근처에 건립했다가 다시 1990년에 도서관이 있는 산정으로 옮겼다가 2003년에 현 위치인 시민 광장으로 왔다.

선생의 아들인 류해동(海東)씨는 평생을 아버지를 모시고 다니며 비서 역할까지 했다.

류해동씨는 일제를 피하여 이역만리에서 선생과 같이 했던 부자 양대에 걸친 애국지사이다.

필자는 선생에 관한 일 때문에 류해동씨를 생전에 가정리로 찾아뵈었다.

내객이 왔다가 말을 듣고 잠깐 기다리게 하고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다음에 맞아주었다.

고령으로 얼마 남지 아니한 머리카락으로 상투를 짰기에 갓 속의 밤톨만한 상투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한 애국지사의 인고의 세월이 느껴졌다.

의암학회가 창립된 것이 2001년으로 알고 있다.

필자는 창립되고 얼마 있다가 운곡학회장을 사임한 뒤에 강원대학의 총장으로 퇴임한 이춘근(李春根) 총장과 함께 의암학회의 이사가 되었다.

학회장 원영환(元永煥) 교수는 매년 의암 선생의 망명지인 중국의 동북지방을 비롯하여 러시아 땅인 연해주까지 선생의 자취를 따라 답사를 하였고 그 결과를 "의암류인석자료집Ⅱ권"에 발표하였다.

3년 전 여름 원영환 교수, 이춘근 총장과 같이 중국 동북지방 선생의 망명생활 유적지를 찾을 기회를 가졌다.

선양에서 자고 아침에 떠나 지평선이 보이는 구릉지대를 차로 4시간을 달려 신비현 평정산진 서산이라는 곳에 이르러 최근에 개설한 의암선생기념원을 찾았다.

산 밑에 구조물 하나를 세우고 의암선생기념원(毅庵先生紀念園)이라고 한문과 한글로 쓰여 있었다.

우리 일행이 온다는 기별이 있어서인지 부녀자 몇 사람이 구조물 주변의 풀을 뽑고 있었다.

반기는 사람도 맞아주는 사람도 없는 이 이국땅에서 가솔과 동지를 이끌고 유랑했을 것이니 망명의 고단함이 어떠하였는지 우리야 알 턱이 없지만 이 기념원 돌계단에 앉아 있으려니 선생의 행적이 어렴풋하게 스쳐가는 것 같다.

학회지에 의암 선생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고 선생의 문집도 함께 읽어 보았다.

우리나라에는 글공부했던 사람이면 문집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 가운데 서(書) 즉 편지가 많기로는 의암 선생의 문집을 따를 것이 없어 보인다.

서의 분량이 1,000통이 넘고 그 가운데는 일본 정부나 중국 정부에 보내는 것, 개인적으로는 당대 중국의 실권자인 원세개에게 보내는 것도 있다.

이렇게 서의 분량이 많은 것은 선생이 망명으로 유전하는 생활을 했다는 것과 광복운동의 의병 동지가 국내외에 흩어져 있어 그 연락 때문이라고 보인다.

끝으로 한마디 선생의 연구서나 자료집으로서 어느 하나 허술한 것이 없지만 자료집Ⅱ는 책상 앞에서 쓴 것이 아니라 선생의 자취를 더듬으며 발로 썼기에 더욱 귀하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최승순 강원대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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