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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동부보훈지청

지(방)청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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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우리지역의 독립운동가 소개-정재 이석용의병장
부서 보훈과
◎ 정재 이석용의병장 (1877.11.29~1914.4.4)
    - 1907.8 진안에서 거의하여 의병대장 추대
    - 1907.9 고창의 일본병참 습격
    - 1908.9 임실전투에서 크게 패전, 의진 해산
    - 1914.4 대구형무소에서 교수되어 순국
    - 1962 건국훈장 독립장 서훈

  전라북도 임실(任實)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의 늑결에 이어 1907년 8월 강제로 군대해산을 당하는 등 날로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이 심해지자, 거의토적(擧義討賊)하여 국권을 회복하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해 낼 것을 결심하였다.
  동지를 규합하고 병장기를 준비하여 1907년 8월 26일 진안(鎭安)에서 거의(擧義)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즈음 정재는 다음과 같은 격중가(激衆歌)를 지어 의병들의 사기를 고무하였다.
진안 석전리에서 기병한 정재의 진용은 대략 다음과 같이 편성되었다.

의병대장 이석용 총 지 휘 박갑쇠·곽자의·임종문
선 봉 박만화·최덕일·송판구 연 락 홍윤무·박성무·윤병준
중 군 여운서·김운서·김성학 도로부장 김사원·김공실·김성율
후 군 김사범·윤명선·김성학 보 급 한규정·박금동·박문국
참 모 전해산·한사국·이광삼 운 량 오기열·조영국·김학문

  1907년 9월 영광(靈光)의 수록산(隨綠山)에서 성재 기삼연이 호남창의진을 편성하고 대장으로 추대되자, 자신은 김익중(金翼中)·서석구(徐錫球)·전수용(全垂鏞, 海山) 등과 같이 종사(從事)로서 활약하였다. 한편 의진의 명의로 전국에 격문을 돌려 항일 사상을 고취하고, 일병 1인을 살해하거나 생포하면 일백냥을 줄 것을 약속하는 현상을 걸어 놓고, 황제께 상소하여 을사오적을 주참할 것을 간청하였다. 또한 대한매일신보에 투고하여 거의한 취지를 밝히고 국민의 협조를 요청하고 진군을 개시하였다.
  9월 12일 밤 고창(高敞)의 일본 병참(兵站)을 습격하고 왜적 굴구원태랑(掘口源太郞)을 총으로 쏘아 팔을 부러뜨리고, 이들로부터 전투장비 수천 건을 탈취 소각하였다. 한편 용담(龍潭)의 심원사(深源寺)에서 김동신(金東臣) 의진과 합세하여 의병 삼백여 명을 영솔하고 산에서 내려오는 왜병과 접전하여 적 수십 명을 격살시켰다.
  1908년 1월 2일 성재가 순창(淳昌) 복흥산(福興山)에서 적에게 패전하고 체포당하여 광주의 서천 백사장에서 순국하자 의진은 다시 분진(分陣)하게 되었다. 이에 정재는 다시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남원(南原)으로 진출하여 적의 장교 3명과 졸병 다수를 격살하였다. 이어서 왜죄 10조(倭罪十條)를 크게 써서 거리거리에 붙여 놓고 황제께 상소하여 기왕의 모든 불평등조약을 폐기할 것과 매국매족한 을사오적을 주참할 것을 간청하였다. 그후 남원·전주 등지를 중심으로 왜적과 수차례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한편 아군의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1908년 9월 임실 전투에서 적에게 크게 패한 후 의진을 해산하고 잠행 유랑하다가, 1913년 겨울 임실에서 한인 형사 김대형(金大亨)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소위 살인·방화·강도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어 1914년 1월 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공판을 받았다.
  정재는 이에 불복공소(不服公訴) 하였으나 공소가 기각되어 1914년 4월 4일 37세의 혈혈 청년으로 대구형무소에서 교수되어 순국하였다.
정재는 생전에 전쟁터에서 많은 우국시를 지어 우국충정을 달래었으니 그 중 한수(首)를 들면 다음과 같다.
   "붉은 피 파랗도록 원한이 치미니
   밤마다 잠못 들고 쓰린 가슴 문지르네
   원수놈 목을 베어 말머리에 달고 와서
   간대 끝에 매달아 남대문에 꽂고 말리"
(突血 天碧劒痕 枕邊不睡痛胸門  野馬獨夫將繫頸 梟我懸我國市南門)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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