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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방보훈청

지(방)청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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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역사 속의 오늘 - 부산항일학생의거(1940.11.23)
부서 선양계
1940년 11월 23일 부산공설운동장(현 구덕운동장)에서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입장식은 전년도 우승교인 동래중학(현 동래고등학교)이 먼저 입장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일본인 학교를 먼저 입장시켰다. 종목별 경기에서도 한국인 학교에 불리한 코스를 배정하거나 차별적 편파 판정이 계속되었다. 거기에 더해 동래중학과 부산 2상(현 개성고등학교) 학생들의 항의는 번번이 묵살당하여 대회장에는 일제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분노가 일고 있었다. 하오 5시경, 폐회식에서 노다이 심판장(乃台兼治, 육군대좌 ; 부산병참기지사령관)의 강평에 이어 일본인 학교가 우승교로 발표되자, 판정의 부당함에 대한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그리하여 6시경, 양 교를 포함 입정상업학교, 초량상업학교 학생들이 가세하여 학생 1,000여명이 시가행진과 노다이 관사 습격을 결의하고 공설운동장을 출발하여 ‘조선독립만세! 일본 놈 죽여라! 무엇이 내선일체냐!’ 등의 항일구호를 외치며 연좌시위에 돌입하였으며, 보수동 네거리에 이르자 대열을 나누어 대청동과 광복동을 거쳐 중앙동으로 시가행진은 계속되었다. 7시경, 4, 5학년생 400여명이 재집결하여 현재 부산터널 오른쪽에 있던 노다이 관사에 도착하니, 노다이는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울분을 참지 못한 학생들은 투석으로 외등과 관사의 유리창을 모두 깨어버린 후 자진해산하였다. 밤 10경, 부산헌병대는 각 경찰서에 긴급지령을 내려 학생들을 현장에서 검거하였다. 11월 24일, 양교는 일본경찰의 취조장이 되었고, 매일 수 십명의 학생들이 연행되었으나 학생들은 일본경찰의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이때 일경과 헌병들에 의해 학생 200여명이 검거되었고, 주모자 15명의 투옥과 징계(퇴학 21명, 정학 44명, 견책 10명 등)가 이어졌다. 공설운동장에서 촉발된 부산항일학생의거는 일제말기 국내에서 전개된 최대규모의 항일학생운동으로, 당시 일제의 삼엄한 통제가 극에 달했던 시대적 상황을 볼 때 광주항일학생운동 보다도 더욱 적극적인 학생운동의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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