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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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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북부)몽양 여운형선생 59주기 추모식 행사
부서 보훈과
조국광복과 민족의 통일을 위해 생애를 바치신「몽양 여운형선생 59주기 추도식」이 19일(수) 12시 우이동 묘소에서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회장 여철연) 주관으로 열렸다. 이날 추도식은 서울지방청장, 백낙청 6·15민족공동위원회 상임대표, 이부영 열린우리당 前 의장, 한택수 양평군수, 기념사업회원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여철연 기념사업회장의 식사, 백낙청 상임대표·이부영 전 의장,·한택수 양평군수 추도사, 유가족 대표 여인영의 인사와 헌화·분향 순으로 진행됐다. 몽양(夢陽) 여운형선생은 경기도 양평(楊平)에서 출생하여 배재학당, 흥화학교 등에서 신학문을 익혔으며, 기호학회 평의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1910년 강릉의 초당의숙에서 민족교육에 매진하였다. 1918년 상해에서 상해고려인친목회를 조직하여 총무로 활동하면서 기관지「우리들 소식」을 발행하였으며, 8월에는 터키 청년당을 모방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총무로 활약하였다. 또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김규식을 초빙하여 파리강화회의 파견대표로 파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문제를 크게 부각시키기 위해 장덕수를 일본에 파견하여 2·8독립선언을 촉발케 했으며, 국내에 김철, 선우혁 등을 파견하여 국내인사들과 접촉하게 하고 자신도 간도·시베리아 방면으로 가서 만세운동의 분위기를 진작시켜 나갔다. 3·1운동 직후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부 차장, 의정원 의원등을 역임하였으며, 11월 일본의 심장부인 동경을 방문하여 일본 고위 관료들을 상대로 한국독립을 역설하여 일본은 물론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1920년 “조국 독립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써 공산당의 원조를 기대”하고 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열릴 때 조선민족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하여 조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10월 상해로 돌아와 독립운동의 장기적 구도아래 백범 김구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를 조직하여 군사적 투쟁도 준비해 갔다. 1940~1942년 간에 여러차례 동경을 방문한 선생은 일본의 폐망을 확신하고 1944년 8월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조직하여 조국광복을 준비하다 두차례에 걸쳐 일경에 피검되어 징역3년과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2005년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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