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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북부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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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직원기고-이애라선생을 기리며
올해는 3·1만세운동을 한 지 제88주년이 되는 해이다.
전 세계의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치열하고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우리 선조들의 독립운동의 정신을 우리는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수많았던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우리가 꼭 알고 있어야 할 열사 한 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이애라 열사님(1894. 1. 7~1921. 9. 4)이다.
선생은 이화학당을 졸업하시고 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이규갑 선생을 만나 결혼하신 후, 공주 영명학교와 평양 정의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고, 3·1운동에 가담했다가 구금되기도 하였다.
선생은 3·1운동 후 국민대회의 소집과 성공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 아현동(阿峴洞)에서 일본 헌병과 맞닥뜨려 백일이 갓 지난 아이가 사망하는 비극 속에 피체되는 고통을 겪으셨다.
출옥 후 대한애국부인회를 통하여 거액의 군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로 보내는데 앞장섰다.
그 후 공주에서 다시 피체되어 일경의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나 충남 아산에서 잠시 몸을 추슬렀으나 마땅한 피신처가 없어서 산으로 올라가서 동네 사람들이 쪄다 주는 겨개떡으로 연명하며 지내셨다.
선생은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시숙인 이규풍 선생이 거주하는 러시아행을 결심하고, 1921년 두 아이를 데리고 경원선 열차로 원산에 도착한 뒤 함북 웅기항에 도착하자마자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일경에 다시 피체되었으나 가까스로 탈출하여 두 아이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으로 피신하였다.
부군인 이규갑 선생은 러시아에서 일본 마적단과 교전 후 형님 집에 달려와 피골이 상접한 아내를 만날 수 있었다. 수년 만에 부군을 만난 선생은 겨우 며칠을 지낸 후 <이제는 어디 가지 마오. 내가 두 무릎으로 걸어서라도 당신을 도우리다.>는 말을 남기고 순국하셨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애라 선생의 시댁은 온 가족이 독립운동에 헌신한 가족이다. 이규갑 선생을 제외한 가족 전원이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보기 드문 집안이다.
이규풍과 이규갑 선생의 모친이 되는 박안라 여사는 형제를 모두 의병전선에 내 보내는 등 독립투사로 훈육함은 물론, 자신은 경기도와 황해도, 평안도 등지를 다니며 애국지사들을 격려하고, 이후에는 시베리아로 이주하여 자식들을 뒷바라지하다가 생을 마치셨다.
이규풍 장군도 나라가 멸망하자 아우와 함께 의병을 조직하여 활동했고, 1908년에는 고종의 밀지를 가지고 노령으로 가서 의병을 이끌었다. 1931년에 국내외로 파견한 동지들이 일본경찰에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피를 토하고 분사하셨다.
이규풍 장군의 부인인 오사라 여사는 1919년 3.1 운동 이후에 시베리아에 가서 독립운동을 내조하다가 이규풍 장군이 순국하자 아들 이민호 박사와 함께 중국 북경으로 가서 항일투쟁을 하던 중 1939년 북경에서 순국했다.
이규풍 장군의 장남인 이민호 박사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인술사업에 종사하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지방을 순회하며 만세운동을 지도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투옥된 후 만기출옥을 하자 시베리아와 중국 북경에서 지하공작 등의 활동을 하던 중 일본경찰에 피체되어 해방을 목전에 둔 1944년 심한 고문 속에 순국하셨다.
이와 같은 가족 전체의 희생과 투쟁 속에는 20대의 꽃다운 나이에 순국하신 이애라 선생의 투쟁이 중심을 이루고 있음은 자명해 보인다.
여성의 몸으로 치욕적인 고문을 감내하였고, 간난아이마저 잃어야 했으며,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결국 사망에 이르신 선생님을 88주년 3·1절을 맞아 풍요로운 오늘을 사는 우리 후세들이 꼭 알고 있어야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아 소개하였다.
-충주보훈지청 보상과장 이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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