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충북북부보훈지청

지(방)청소개

국가보훈부(국문) - 우리청소식(충북북부보훈지청) 상세보기 - 제목, 내용, 파일, URL 정보 제공
(충주)유자명선생 유품 특별전 개막식
지난 3월 2일부터 3월 25일까지 충주박물관에서는 충주출신 애국지사 유자명 선생의 유품을 전시하는 행사를 갖는다.
유자명선생은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에 충주 간이농업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중심의 시위 계획을 준비하던 중 일경의 밀정에게 사전 탐지되자 상해로 망명하였다. 망명하기 전 그는 이병철(李秉澈)·안재홍(安在鴻) 등과 함께 청년외교단을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상해에서 그는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는 한편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과 동척(東拓)을 습격한 나석주(羅錫疇)의 소개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2월에 김규식(金奎植)·이광제(李光濟)·안재환(安載煥) 및 중국인 목광록(睦光錄), 인도인(印度人) 간다싱·비신싱 등과 함께 남경(南京)에 모여서 동방민족이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을 척결하고 완전 자주독립을 도모함에는 우선 동방 각 피압박민족이 연합 단결하여 공동전선을 구성하고 제국주의자에 항쟁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전제하에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중국 국민당 중앙본부와 협의하여 적극 후원을 약속 받고 회장에 김규식(金奎植)을 선출하였다. 기관지로는 월간 「동방민족(東方民族)」을 영어·중국어·한국어로 발간하여 관계된 여러 나라에 발송하였으며, 또 비밀리에 각국의 인원을 선발하여 비밀지부(秘密支部)를 설치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운동 범위를 확장하는 등, 제반 공작을 추진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조선혁명자연맹(朝鮮革命者聯盟)에 간부로 활약하면서 무창(武昌)의 입달학원(立達學院)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1930년 4월에는 상해 강만(江灣)의 농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장도선(張道善)·정해리(鄭海理) 등과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였으며, 이듬해 11월에는 무정부주의자 유기석(柳基石)·정치화(鄭致和) 등과 불멸구락부(不滅俱樂部)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6년에는 중국군과 합류하여 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로서 항일전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지도하던 그는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에 있던 무정부주의자의 훈련소인 민단훈련소(民團訓練所)에서 참모로 있던 이우관(李又觀)·정화암(鄭華岩) 등과 함께 무정부주의자연맹 상해부(無政府主義聯盟上海部)를 조직하고 극단적인 무력항쟁을 계획하여 1933년에는 일제 앞잡이인 유길명(有吉明) 등을 6·3정에서 암살하는 공작을 지휘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942년에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약헌개정기초위원(約憲改正起草委員)을 역임하였으며, 1943년 3월에는 임시정부 학무부 차장에 임명되었고 광복시까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또한 2006년 1월에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하였으며, 충주시에서는 유선생의 공적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중국에서 선생의 유품을 200여 점 인수하여 금번 3.1절을 계기로 전시회를 계획한 바 2007년 3월 2일 유자명선생 유품 특별전의 개막식을 거행하였는데 전승원 충주시주민생활지원국장, 이우석 충주보훈지청장 · 정하택 보훈과장, 송재준 충주MBC보도편성제작부장, 조명래 건국대학원장, 허문회농학자, 이융주 충북대박물관장, 김한기 박물관운영자문위원장, 윤경로 · 유인상 등 독립유공자 유족과 시민 등 400여 명이 참석하여 뜨거운 관심을 표현하였다.
파일
U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