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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강릉)하얼빈 의거 99주년 안중근을 다시본다 유가족과 후손은 지금
부서 보훈과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중국 뤼순형무소에서 옥사(獄死)했다. 안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사망할 당시 나이는 서른두 살. 안 의사는 이미 혼인을 해 가정을 이룬 상태였다. 고향에는 처 김아려(金亞麗)와 2남1녀(분도, 준생, 현생), 어머니 조마리아, 동생(정근, 공근, 성녀)이 있었다. 정근과 공근도 이미 결혼해 식솔이 있었다.
집안의 장남이 사망하자 졸지에 집안의 가장이 된 정근(定根)은 어머니, 형의 유족, 자신의 가족, 공근의 가족, 여동생 성녀 등 권속 모두를 이끌고 망명을 선택한다. 러시아 연해주로 들어간 유가족은 1919년 중국 상하이로 옮겨갈 때까지 10년간 러시아에서 산다. 러시아 생활 중 안 의사의 장남인 분도는 병으로 세상을 뜬다.
유가족은 러시아에 살면서 독립운동의 후원자 역할을 맡았다. 이광수, 이동휘, 이동녕 등 수많은 독립애국지사들이 모두 안정근의 집을 찾아왔다. 안정근은 신변의 안전을 위해 러시아 국적을 취득, 러시아군에 입대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안정근이 러시아에서 상하이로 이주를 결심한 배경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형의 유자녀, 자신의 장남, 공근의 장남의 교육 때문이었다.
안정근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게 된다. 임시정부 내무차장과 대한적십자회 최고책임자를 맡았다. 안정근은 북간도 파견요원으로 1920년의 청산리전투를 현장에서 체험한다. 이후 안정근 일가는 웨이하이, 베트남, 홍콩, 상하이를 떠돌며 독립운동을 한다.
안중근의 아들 준생(俊生)은 상하이에 살다가 홍콩을 거쳐 가족을 이끌고 6·25전쟁 중에 부산에 들어온다. 하지만 1951년 1월, 폐결핵이 발병해 부산항에 정박 중인 덴마크병원선에서 치료를 받던 중 1952년 11월, 4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안준생의 유해는 부산시 초량 4동 뒷산에 안장되었다가 1971년 경기도 포천 천주교공원묘지로 이장되었다.

 
안준생은 유가족으로 부인 정옥녀와 1남2녀를 두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부인 정옥녀는 자녀를 데리고 “조국이 통일되면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안 의사의 장손인 웅호(雄浩)씨는 미국에서 성장해 심장외과 권위자로 활동했다. 최근 뇌출혈로 쓰러져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로 전해졌다.
안정근은 1949년 상하이에서 뇌암으로 숨졌다. 당시 중국 신문은 이를 ‘한국혁명원로 서세(逝世)’로 보도했다. 안정근의 유가족으로는 처 이정서와 2남4녀가 있다. 차남 진생(珍生)은 이탈리아 제노아대학에서 조선공학 박사를 받았고 귀국한 뒤 대한조선공사 부사장을 거쳐 콜롬비아 대사, 미얀마 대사 등 외교관으로 18년을 근무했다.
1988년 사망해 용인천주교묘지에 잠들어 있다. 안진생의 부인 박태정씨는 현재 도봉구 창동에서 딸과 살고 있다. 미생(美生)은 김구 선생의 며느리가 되었고 김구 선생 사망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안 의사의 막내동생 공근(恭根)은 2남3녀를 두었는데, 광복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북한에 후손들이 살고 있다. 딸 연생(蓮生)만 오랜 세월 파나마에서 살았는데,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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