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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북부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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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感動 의정부) 2007.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위종
부서 보훈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위종)
 
   이위종 (李瑋鍾) 선생
(1877 ~ 미상)
이위종은 대한제국기의 외교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전주(全州)로, 서울 출신이다. 그의 조부는 고종재위          초기에 포도대장을 지낸 이경하이고,
부친은 아관파천 전후에 농상공부대신, 법부대신, 경무사, 주미공사, 주 러시아공사 등을 역임한 범진(範晉)이다. 부친 이범진과 그는 모두 대한제국의 외교관이었고, 그의 형 기종(璣鍾)도 외교관을 지냈다.
  그는 주미공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7세 때 미국으로 가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4년 뒤에는 유럽주재 공사로 임명된 부친을 따라가서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런 성장과정을 통해 그는 영어·불어·로어 등 3개 국어에 능통하였다.
  1905년 그는 러시아 귀족의 딸 놀껜양과 결혼하였다. 러시아 여성과 결혼한 최초의 한국외교관이었다. 을사보호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던 바로 그해였다.
  이때 그의 부친은 주 러시아 한국공사로서 뻬쩨르부르그에 근무하고 있었다. 일본 측은 이후 각국의 한국공사관을 폐쇄조치하였으나, 이범진은 이에 불응하여 아들 위종과 함께 현지에 체류하면서 비공식적 외교활동을 지속하면서 미래의 기회를 기다렸다.
  마침내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고종은 이위종을 헤이그에 파견하는 3명의 특사 중 한 사람으로 임명하였다. 정사 이상설(李相卨), 부사 이준(李儁) 등과 함께 이위종은 뻬쩨르부르그에서 합류하였다.
  부친 이범진의 지원으로 러시아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협조를 얻은 뒤, 이위종은 헤이그에 도착하여 한국대표로서 회의장에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펼쳤다. 이위종은 유창한 영어와 불어, 러시아어로 각국 대표와의 교섭과 문서작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때 신문기자단과 네덜란드의 현지 여론은 한국대표들의 주장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각국 대표는 냉담하였고, 특히 일본 측의 방해공작으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이에 특사 일행은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세계에 선언하였다. 그리고 공고사 (控告詞 :고하는 글)를 프랑스어와 영어로 번역해서, 6월 27일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대표들에게 제출하는 한편, 신문을 통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7월 9일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서 이위종은 불어로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강연을 하였다. 요지는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은 일본이 강제와 무력으로 체결한 것이므로 무효이며, 한국의 국민과 황제는 한국의 자주독립과 세계의 평화를 열망하고 있다, 세계가 한국독립에 협조해 줄 것을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의 열변은 회합에 참석한 각국대표와 수행원들, 언론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어, 즉석에서 한국의 입장을 동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의 박수로써 의결하도록 하였다. 연설문이 헤이그에서 발행되던 신문(Haagsche Courant)에 보도되어 국제여론을 환기하는데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국제여론은 여론일 뿐 한국의 운명을 되돌 릴 수는 없었다. 이때 울분에 차 있던 이준이 현지에서 발병하여 갑자기 운명하였다. 이상설과 이위종은 이준의 장례를 치르고, 이를 전후하여 영국과 미국 등 각국을 순회하며 한국을 위해 호소하였다.
  헤이그특사사건으로 국내에서는 고종이 강제로 퇴위를 당하였고, 일본 통감부에서는 특사들에게 궐석재판을 진행하였다. 이상설은 사형,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징역형이 선고 되었다. 이미 타계한 이준에게 종신징역형을 선고한 것이 특이했다.
  이후 이위종은 블라디보스톡과 뻬쩨르부르그를 오가며 권업회(勸業會)에 참가하여 활동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잘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그의 독립운동과 함께 러시아혁명의 발발로 인해 단란했던 가정은 극심한 곤경에 처하였다는 것, 러시아혁명 당시 내전에 가담한 그가 모스코바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연설하였다는 것 정도이다.
 
  이위종과 그의 부친 이범진, 그의 형 이기종은 3부자가 대한제국의 외교관으로 활약한 특이한 사례이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일찍이 서양에 가서 성장하였고, 서양의 언어와 문화에 익숙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여성과 결혼하였다.
  그는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어 현지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고, 이후로는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였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1962년 이위종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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