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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북부보훈지청

지(방)청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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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感動 의정부) 2007.6월 이달의 우리고장 현충시설물
부서 보훈계
 6월 이달의 현충시설
(용문산지구 가평지구 전적비)
   용문산 전투는 1951년 5월 17일부터 28일까지 전략적 요충지인 용문산 지역에서 6사단이 치열한 교전끝에 중공군 63군 예하 3개 사단 2만여명에 달하는 병력과 주요장비를 상실시킨 한국전쟁 최고의 전과를 세운 전투이다.
   1951년 5월 중공군의 춘계공세에 밀리던 국군과 유엔군은 새로운 전선의 재정비를 위하여 대포리 ~ 용문산 ~ 구파발로 이어지는 신방어 지대를 형성하였습니다.
   이때 미 9군단의 중앙 부대였던 6사단은 주저항선 전방인 북한강부터 홍천강 남안에 2연대를 추진 배치하고 용문산 좌우측 능선에 7연대와 19연대를 배치한 상태에서 철저한 정신무장으로 “결사(決死)”라는 머리띠를 두르고 전의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5월 18일, 어둠이 깔릴 무렵 중공군 63군의 2개 사단이 북한강과 홍천강을 도하하여 아 6사단 2연대의 전방대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으며 2연대는 강인한 청성투혼을 바탕으로 가용 화력을 총동원하여 근접전투와 과감한 역습을 통하여 완강히 저항하였습니다.
중공군은 저항이 워낙 완강하자 예비사단까지 공격에 투입하였고 아군의 2연대는 27포병대대의 적시적인 화력지원에 힘입어 치열한 교전 속에서 방어에 성공하였습니다.
2연대의 전면방어 성공을 기반으로 사단은 5월 20일 05:00에 2연대를 포위공격하고있던 중공군을 7연대와 19연대로 측후방에서 공격함으로써 중공군 63군 3개 사단은 2만여명에 달하는 병력과 주요장비를 거의 상실하는 등 결정적인 타격을 받고 철수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용문산 전투는 큰 승전보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용문산 전투는 우리 6사단이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을 전면방어의 신화로 격퇴함은 물론 그 여세를 몰아 화천발전소를 탈환하고 중공군 3개 사단의 잔류자를 전원 북한강에 수장시키는 등 한국전쟁사에서 최고의 전과를 올린 전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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