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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서부보훈지청

지(방)청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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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우리고장출신 독립운동가 이성용(李成用)
부서 보훈과

 전북 고부 사람이다.
 1909년 김영백 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김영백 의병장은 1907년 10월경 전남 장성에서 거의하여 장성을 중심으로 광주,고부,정읍,태인,부안,흥덕,고창 및 순창의 각 고을을 무대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1908년 3월 4일(음력)에는 정읍 단곡리에 주둔중인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여 전공을 세웠다. 7월에는 흥덕군 주둔 수비대 보병과 격전을 벌였다. 9월 21일 방장산 산록 백계동에서 수비대 기병, 헌병, 순사의 일제 연합부대와 교전하였다. 10월 상순 장성군 북이면 신기리에서 교전하였고 11월 상순에는 장성군 오현에서 헌병과 교전하였다.
1909년 1월말경에는 장성군 북이면 상곡리에서 수비대 기병과 그리고 2월 말 흥덕군 세곡리, 4월 11일 일동면 구수교, 4월 중순에는 고부군 강고리, 4월 말경에는 흥덕군 일남면 유점리에서 각각 일군과 교전하는 등 기세를 떨쳤다.
 이성용은 이와 같은 김영백의진에 소속되어 전남북 일대에서 일본군을 격퇴하는등 활동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이지역 의병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자 더 이상 활동을 계속하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김영백 의병장은 군사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수하고 말았다.
 이성용도 김영백 의병장과 함께 자수하여 1910년 2월 7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소위 폭동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항일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던 그는 광주감옥 전주분감에 수감 중 재거의를 위해 동료들과 탈출을 기도하였으나 아쉽게도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10년 3월 4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받고 이해 5월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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