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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청소식

지(방)청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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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부산출신 독립투사 박재혁의사 순국85주기 추모식 열려
부서 지도과
부산지방보훈청(청장 추헌용)은 (사)3.1동지회, 박재혁의사기념사업회 등 관련 단체와 함께 부산지역의 독립운동가인 박재혁 의사 순국 85주기를 맞이하여 2006.5.12(금) 14:00 부산진구 초읍동 어린이대공원 내 박재혁 의사 동상을 찾아 추모식을 가지고 조국의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의사의 위훈을 기리며 국가보훈처장 명의의 화환을 근정하였다. 박재혁 의사는 부산 동구 출생으로 부산진공립보통학교와 부산공립실업학교(현. 부산개성고)를 졸업하고 부산전기회사 전차차장으로 근무하였고 왜관에서 무역상회의 고용인으로 일하던 중 1917년 6월 주인으로부터 자본금 700원을 얻어 상해로 가서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1918년 6월 귀국하였다. 그는 보통학교와 실업학교 동창인 동지 최천택(崔天澤)에게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투쟁할 것을 말하고 기회를 노리던 중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상해로 가서 중국 각지와 싱가폴 등지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는 한편 여러 독립투사들과 교제하였다. 1920년 3월에 귀국하였다가 8월에 상해로 가서 김원봉을 만나 군자금 3백원을 받아 부산경찰서를 파괴하고 그 서장을 사살할 것을 계획, 동년 9월 상순 폭탄을 휴대하고 상해를 떠나 동월 13일 부산에 상륙하였다. 그는 다음날(14일) 오후 2시에 고서보따리로 위장한 폭탄을 등에 지고 경찰서로 서장을 찾아가 서장과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몇 마디 환담을 하고는 고서를 꺼내는 척 하면서 폭탄을 꺼내들고 서장을 유창한 일본말로 꾸짖은 후 폭탄을 던져 폭발 시켰다. 이 의거로 서장은 부상을 당하고 그도 중상을 입은 채 피체되었다. 그는 모진 악형 끝에 기소되어 부산지방법원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공소하여 1921년 2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언도받자 다시 상고하여 1921년 3월 31일 경성고등법원에서 다시 사형을 언도받아 형이 확정되었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혹독한 고문과 폭탄의 상처로 몹시 신음하다가 폐병까지 생겨 고통이 심하므로 "왜적(倭賊)의 손에 욕보지 않고 내손으로 죽자"하고 단식하다가 형 집행 전에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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