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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 태극기" 원형 발굴 공개
부서 보훈팀
독립기념관(관장 김삼웅)이 28일 대한민국 최초의 태극기 원형을 발굴, 공개했다.

 이날 독립기념관에 따르면 지난 2월초 영국국립문서보관서(National Archives)에서 최초의 태극기를 확인, 발굴해 3.1절을 기념해 공개했다.

 독립기념관이 공개한 최초의 태극기는 1882년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제작한 태극기 원형을 그대로 그린 것으로, 1882년 11월 1일 당시 일본외무성 외무대보(차관) "요시다 기요나리"가 주일 영국공사 "해리파크스(Harry Parkes)"에게 보낸 문서에 첨부돼 있었다.

 공개된 태극기 원형은 현재 태극기와 같이 중앙에는 태극을 그려 청색과 홍색으로 색칠하고, 네 모서리에는 건(乾)·곤(坤)·감(坎)·이(離) 사괘를 그렸다.

 원형의 원래 크기는 가로 142.41cm, 세로 115.14cm, 태극기 지름 81.81cm.

 독립기념관 김용달 수석연구원은 이날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태극기 원형은 동국대 한철호 교수가 태극기를 조사 연구하는 과정에서 영국국립문서보관소에 있음을 확인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와 공동 발굴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연구원은 또 “최초 태극기 원형이 발굴됨에 따라 국기에 대한 정확한 유래와 자부심을 갖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독립기념관이 제시한 "최초의 태극기"라는 세 가지 증거

 그동안 태극기 원형에 대한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이번에 최초 태극기 원형이 발굴, 공개됨으로써 그간의 논란이 결말을 맺을 전망이다.

 독립기념관은 이 태극기가 최초의 태극기라는 세 가지 증거를 제시했다.

1. 태극기와 함께 동봉된 문서 작성일=박영효 일본 체류기간

 첫째 태극기와 함께 동봉된 문서 작성일이 1882년 11월 1일자로 적혀있다, 이 날은 수신사 박영효가 일본 도교에 체류하고 있던 기간과 일치한다.

 박영효의 "사화기략"에 의하면, 그는 10월13일 도쿄에 도착한 뒤 12월 27일 귀국길에 올랐다. 박영효는 9월 25일 영국인 제임스선장의 자문을 구해 "태극 4괘 도안"의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키로 결정하고, 10월 3일 이 사실을 정부에 보고했다. 이후 그는 도쿄에 체류하는 동안 각종 행사에 참석하면서 이 국기를 내걸었다.

2. 태극기와 함께 동봉된 문서 내용에 일본 외무성이 그린 사실 확인

 둘째 태극기와 함께 동봉된 문서내용을 보면, 요시다 외무대보가 “며칠 전 귀하(해리파크스)의 구두 요청에 따라 조선의 국기 사본을 동봉”한다고 밝히고 있다.

 박영효가 10월 3일 국기 제정을 정부에 보고하는 서한에서 “영국, 미국, 독일, 일본의 여러 나라가 모두 그려가기를 청하니, 이것은 천하에 알려 밝히는 데 관련된 것”이라고 기록했던 사실로 미뤄 방문 당사국인 일본 외무성이 박영효가 제작한 태극기 2본(대·중)가운데 하나를 그려놓았고, 이를 다시 파크스의 요청으로 사본을 만들어 보내준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된다는 것.

3. 태극기와 박영효 기록과 일치

 셋째 이 태극기가 박영효의 기록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박영효는 9월 25일 “새로 만든 국기를 묵고 있는 누각에 달았다.

 기는 흰 바탕으로 네모…중앙에는 태극을 그려 청색과 홍색으로 색칠하고, 네 모서리는 건(乾)·곤(坤)·감(坎)·이(離)의 사괘를 그렸다”든가, 10월 3일 보고서에도 국기 제정을 의논했던 제임스 선장이 “태극 팔괘 형식은 특별히 뛰어나 눈에 띄지만, 팔괘의 분포가 자못 조잡해 명백하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되며, 또 각국이 이를 모방해 만드는 데 있어 매우 불편하니, 다만 사괘만 사용해 네 모서리에 긋는다면 더 아름다울 것이다”고 말한 사실을 적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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