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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동부보훈지청

지(방)청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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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8월의 독립운동가 정환직(鄭煥直)선생
부서 보훈과
◈ 아들에 이어 산남의진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순국 ◈
 
 국가보훈처(처장 김정복)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산남의진(山南義陣)의병장으로 활동하시다 순국하신 정환직선생(1843~1907)의 순국 100주년을 맞이하여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자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경북 영천 출신으로 1887년 북부도사(北府都事)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가 1888년 의금부 금부도사(禁府都事), 1894년 삼남참오령(三南參伍領)․토포사(討捕使), 1899년 삼남검찰 겸 토포사․시종관, 1900년 원수부위임(元帥府委任)겸 삼남관찰사․도찰사(都察使),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등을 역임했다.
  선생은 일제가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의 강점을 노골화 하자 반일무장 투쟁만이 국권회복의 길임을 깨닫고 아들 정용기에게 의병을 일으켜 강릉으로 북상하도록 하고, 자신도 서울로 올라와 관직에서 물러난 동지들과 협력하여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오대산으로 보낸 후 의진에 합류하여 서울 진공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아들 정용기가 이끄는 의병진의 북상이 늦어지자 1907년 9월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선생은 그해 10월 7일 아들 정용기가 입암에서 일본군 영천수비대를 맞아 싸우다 순국(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하자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고 진영을 4개 소대로 재편성한 후 직접 의병장이 되어 일제의 군대, 헌병분견소 등을 습격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선생은 1907년 12월 11일 고천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일제의 간교한 회유책에도 뜻을 굽히지 않자 영천으로 호송되어 영천 남쪽 교외에서 장렬히 순국하셨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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