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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서부보훈지청

지(방)청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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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우리고장출신 독립운동가 임병률(林秉律)
부서 보훈과
 전북 김제 사람이다.
 1919년 전북 옥구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서울에서 귀향한 김병수로 부터 독립선언서와 함께 서울의 시위상황을 전해들은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이두열 등은 곧 군산의 기독교인 김성은,개정면의 기독교 병원 사무원 양기준 등과 거사계획을 협의하였다. 당시 개정면 구암리 기독교병원의 사무원으로 근무하던 임병률도 이와 같은 계획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3월 6일의 군산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영명학교 학생들로 하여금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도록 하는 등 준비를 갖추었다. 그런데 거사 전날인 3월5일 발각되어 거사가 좌절되기 직전에 놓이자 교사 김윤실과 영명학교 학생들은 긴급회의를 갖고 그 즉시 만세시위에 돌입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영명학교 학생들과 기독교 계통의 여학생이 합류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군산시내로 시가행진을 전개하였다. 시위 도중에 기독교 신도들과 주민들이 합세하였고 보통학교의 학생들도 참여하여 평화동과 영동을 거쳐 본정 큰거리에 이르는 동안 시위대는 5백여 명에 이르렀다.
 군산시내의 시민들도 학생들의 거사에 감격하여 행렬에 동참하였다. 학생들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배부되고 태극기도 전해졌다. 시위대의 일부는 경찰서로 몰려가서 구속 인사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당황한 적경들은 이리 주재 헌병대의 응원을 얻어 주동 인사들을 검속하고 군중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임병률도 이 일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6월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과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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