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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방보훈청

지(방)청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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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박차정 의사를 아십니까
부서 선양2팀
박차정 의사를 아십니까?
박차정 의사는 1910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민족교육의 전통이 강했던 일신여학교 재학 중 민족운동에 투신하여 조선소녀동맹 동래지부에서 활동하였고, 동래청년동맹의 집행위원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27년 근우회 동래지회 결성에 참여하고, 민족독립에 관한 글을 발표하였습니다. 또한 1929년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선전조직과 출판부문을 담당하였고, 1930년 1월 서울의 11개 여자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를 배후에서 지원한 것으로 밝혀져 시위 직후 피체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선생은 1930년 중국 북경으로 망명한 뒤 의열단에 가입하고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31년 김원봉과 결혼, 1932년 남경으로 옮긴 뒤에도 김원봉을 도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개설을 준비하였고, 개교 후에는 여자부 교관으로 교양교육과 훈련을 담당하였습니다.
1935년 남경에서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그 지원단체로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고, 여성들을 민족독립운동으로 끌어들였으며 1937년 좌익 민족운동세력의 결집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 창설에 동참하였고, 그 산하 무력으로 1938년 한구에서 결성된 조선의용대에도 참여하였습니다. 특히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을 맡아 무장항일투쟁에 진력하던 중, 1939년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였으며 1944년 5월 27일, 선생은 부상 후유증으로 35세의 젊은 나이로 서거하였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2008.3.1(토) 올해로 열세번째를 맞는 동래만세재현행사에서는 동래고 맞은 편 박차정의사 생가 앞에서 박차정 의사의 명복을 비는 살풀이 공연과 퍼포먼스가 개최됐으며, 생가 개방으로 많은 시민들이 함께 여성으로서 무장항일투쟁에 앞장섰던 부산출신 독립운동가 박차정의사의 얼을 기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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