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청소식

지(방)청소개

국가보훈부(국문) - 우리청소식(경남동부보훈지청) 상세보기 - 제목, 부서, 내용, 파일, URL 정보 제공
[파워마산]학생 독립운동기념일
부서 보훈과
마산보훈지청 이윤희 11월의 광주거리를 걸으면 어디에선가 학생들의 우레 같은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어느 시인은 1929년 11월 3일의 학생시위를 생각하면서 감격에 겨워 이렇게 읊었다. 그대/ 조국을 사랑하는 그대/무등에 올라/ 활화산처럼 불타오르던 /그날의 함성을 들은 적이 있는가/ 빛 고을 넓은 벌/ 만세소리 외치며 달리던/ 단내 나는 그들의 가뿐 숨소리를 기억 하는가/ … 내 조국을 찾을 수만 있다면/이 치욕을 벗어날 수 있다면/ 이내 한 몸 죽어도 좋다던 그들의 피맺힌 절규를 어찌 잊으리/ 민족정기는 어떤 압제에서도/ 결코 시들지 않는 것/ 역사가 증명하지 않았던가/ … 태양이 이 강토를 비추고/ 동해바다 파도 스러지지 않는 한/ 그대들 한 떨기 무궁화 꽂으로/ 다시 피어나리라. 지난 11월 3일은 제 77주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였다. 모두가 텅 빈 동공으로 엎드려 살아야만 오욕의 시절, 빛 고을 넓은 벌에 끝없이 이어진 학생들의 행렬과 끊어지지 않는 함성은 무등을 휘몰아 광주전역을 진동했다. 이 운동은 단순한 학생운동이 아니라 3.1운동 때의 독립만세 구호대신 ‘약소민족 해방만세, ’제국주의 타도만세‘ 등의 구호를 외쳤으며 비폭력 노선을 배격하고 폭력노선을 선택하여 일제와 싸웠다.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모두 212개 학교와 5만4천여 명의 학생들이 궐기에 참가한 이 운동은 582명이 퇴학을 당하였고, 2330명이 무기정학, 146명이 검거된 대운동 이었으며 “약소민족 해방만세’ 같은 구호들이 처음으로 등장하여 식민지 노예교육을 반대하는 동시에 민족해방 이라는 정치적 요구가 명확히 드러난 3.1운동 이후 최대의 독립운동 이었다. 사람들의 기억에 광주 학생의 날로 남아있던 이 날이 지난 달 국회본회의를 통과하여 ‘학생독립운동 기념일’ 공포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지금까지 지역독립운동 으로만 알려져 있던 이 운동이 전국적인 규모의 독립만세운동으로 거듭나게 되었음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운동발생의 직접적인 원인은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이 한국의 여학생들을 희롱하는 데서 발발했으나 속으로 우리민족의 억압된 분노가 폭발된 상징적인 사건으로서 어린 학생들의 드높은 의기는 나라사랑 정신이 어떠한 것인지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준 역사적인 쾌거였다. 북한의 핵실험으로 인한 안보불안 상황 , 일본의 급격한 군사대국화에 대한 우려와 중국의 의도적인 도발행위 등 현재의 상황이 꼭 100년 전 구한말과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 같아 썸짓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동해바다 파도 스러지지 않는 한 ”한 떨기 무궁화로 다시 피어나리라“고 염원했던 젊은 학생들의 드높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사분오열된 국론을 하나로 묶어 이 난국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김해신문 2006. 11. 9일 기고게재>
파일
U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