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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북부보훈지청

지(방)청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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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현충시설물(증평 연병호선생 생가) 시리즈 홍보 추진
충주보훈지청에서는 금년도 매월 이달의 현충시설물을 선정하여 도정소식(충청북도 도정지)에 시리즈 홍보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3월의 현충시설물 (증평 연병호선생 생가) 산수 닮아 깨끗하고 강골한 심성이 돋보이는 연병호(延秉昊) 선생 생가 증평군 일대는 백두대간이 남으로 뻗어 내리면서 빚어놓은 명산이 선경을 이루고 있어 이곳의 산자수명한 자연을 사랑해 예부터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풍류를 노래했다. 청정하고 쾌적한 삶의 터전을 지키는 사람들의 심성도 자연을 닮아 깨끗하고 강골한 이곳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에 독립지사 연병호(延秉昊)선생 생가가 있다. 연병호선생(1894~1963)은 증평이 나은 독립운동가로 자는 순서(舜瑞), 호는 원명(圓明)이다. 1894년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에서 태어났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맏형인 병환(秉煥)을 뒤따라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가 1919년 상해임시 정부 수립 후 조국에 돌아와 임시정부 후원과 국제외교를 위해 청년외교단을 조직하였다. 1921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해 북경에서 독립혁명당(獨立革命黨)을 조직했으며, 1934년에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뽑혀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이 무렵에 독립공론(獨立公論)을 발행하여 민족정신 고취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1937년 일본 관헌에게 체포돼 8년형을 선고받고 대전과 공주 감옥 등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0월 출옥하였다. 광복 후에는 임시정부 환국준비위원회 영접부장이 되었으며, 초대, 2대 국회의원으로 건국에 이바지하였다. 제헌의원 시절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해 관철시켰다고 한다. 선생은 1963년 생가에서 타계했으며,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연병호 선생은 평생 나 보다는 국가를 먼저 생각하고 가족보다는 국민을 먼저 보호하고자 하셨으며, 광복이 되고 제헌국회의원으로 활동하셨으면서도 돌아가신 후에 남은 것이라고는 평소에 신었던 검정고무신 단 한 켤레뿐이라는 사실에서 청렴함과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 하신 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월에는 연병호선생 생가를 방문하여 나라의 독립에 힘썼던 선생을 기리고 현실을 한번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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