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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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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국문) - 우리청소식(경북남부보훈지청) 상세보기 - 제목, 부서, 내용, 파일, URL 정보 제공
[경주]우리고장 출신 독립운동가-손영술(孫永述)
부서 보훈과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그는 국권회복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정용기(鄭鏞基), 정환직(鄭煥直) 의병장이 이끄는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6년 3월 정환직은 아들 정용기로 하여금 고향인 경북 영천에서 의병을 일으키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정용기는 이한구(李韓久), 손내숙(孫 叔) 등과 힘을 합쳐 거의를 준비하였다.
이윽고 정용기 의병장은 포수와 농민 등의 민병을 규합하여 경북 영천에서 산남의진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적의 모략에 속아 정용기 의병장이 피체됨으로써 제대로 뜻을 펴지 못하고 의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출옥한 정용기 의병장은 뜻을 굽히지 않고 1907년 각지에서 활동하던 의사들을 모아 북동산(北東山)에서 산남의진을 재결성하였다.
이후 산남의진은 해산군인을 포섭하여 병력을 보강하고 군령을 정하여 장병들을 단속하는 등 군세를 확장하고 같은 해 8월부터는 청하읍을 습격하고 청송 신성(薪城)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여 기세를 떨쳤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입암(立巖)전투에서는 중과부적으로 의병장 정용기를 비롯하여 손영각(孫永珏), 권규섭(權奎燮) 등 전사 순국하는 패전을 겪었다.
1907년 재거의한 정용기 의병장이 전사순국하자 정환직은 아들을 이어 직접 의진을 구성하여 대일항전에 나섰다.
이후 정환직 의병장은 의진을 소규모 단위부대로 재편성하고 경북 일원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다수를 사살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손영술은 이와 같은 산남의진에 소속되어 초장(哨長)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별래현(別來縣)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청하현(淸河縣)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탈옥하였다. 일제는 관직을 미끼로 회유하려고 하였으나 그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였고 결국 그의 모친은 옥사하고 가옥이 소실되었으며 부인은 자결하는 참사를 겪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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