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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좋은북부) 대한제국의 마지막 외교 특사, 이준!!!
부서 보훈선양계
대한제국의 마지막 외교 특사, 이준!!!    - 서울북부보훈지청장 신현재 -
     
헤이그 특사 100주년을 맞아 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을 기리는 추념식이 7월 14일 오전 강북구 수유리에 있는 선생의 묘전에서 열렸다.
 1905년 일제가 한국의 황제를 비롯해서 각료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이에 따라 외교권을 박탈하여 외국에 나가 있는 사신을 소환하고 통감부을 설치하여 실권을 하나하나 박탈하여 대한제국의 국체는     형해화하기에 이르러 국가는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이럴 즈음인 1907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26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다는 정보가 들어와 4월 고종은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과 전 평리원 검사 이준에게 회의에 참석할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회의참석의 주선을 부탁하는 내용의 친서를 휴대하게 하여, 이들 대표에게 만국회의에 나가 당시 한국의 실상을 전세계에  알리도록 하였다. 이들 대표는 비밀리에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전하고 전 러시아 공사관 서기 이위종과 동반하여 6월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헤이그에 도착한 3인의 특사, 그러나 이들은 만국평화회의장소에 들어가지 못했다. 러시아의 배신과 일본의 방해 공작으로 최종 명단에 누락된 것이다.

열강들의 이해관계와 일본의 물밑작업으로 결국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한 이준 특사 일행, 그러나 이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일본의 만행과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연설과 함께 호소문을   만들어 배포하였고,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에 능통한 이위종이 세계의 언론들에게 한국의 비참한 실정을 알리고, 주권 회복에 원조를 청하는 ‘한국의 호소’를 프랑스어로 절규, 청중의 공감을 샀다. 이에 이준 특사 일행의 활약상은 평화회의보 1면에 대서 특필되었고 뉴욕타임즈를   비롯해 서방언론들이 한국에 대한 기사를 싣기 시작하면서 위기에   처한 대한제국의 사정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위종이 갑자기 배우자의 건강악화 소식으로 러시아를 떠나면서 외국어에 능통하지 못한 이준과 이상설, 그들은 고립되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외교 전쟁이 한창이던 중, 이준은 돌연 호텔방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 죽음의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는 상황에서 일본은 이준이 병으로 죽었다고 여론 몰이를 하였다.
일본의 방해로 뜻한 바 이루지 못하여 격분한 끝에 조국의 억울한    실정을 온 세계에 알리기 위하여 분사를 하였지만, 일본은 세계 언론을 잠재우기 위해 미리 병으로 죽었다고 여론 몰이를 한 것이다.
또한, 일본은 이준이 죽은 뒤에도 궐석재판을 열어 이준에게 종신징역을 선고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헤이그에서 쓸쓸히 숨진 이준열사의 유해는 그가 숨진지 56년만인 1963년에야 고국으로 돌아왔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우던 투사가   분단된 조국으로 돌아와 고향이 아닌 수유리 묘지에 묻히게 된 것도 또한, 씁쓸한 일이다.
과연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100년이 지난 지금,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아무도 도와주려 하지 않는 상황에서 일본의 방해와 열강들의 이권속에서 나라잃은 국민의 서러움을 느꼈을 그들을 생각하며, 오늘의 우리를    되돌아본다.
얼마나 외롭고 막막하였을까?
친일파의 후손들이 매국의 대가로 얻은 땅을 되찾고자 소송을 벌이고 있는 현실에서,
시시각각 좁혀오는 일제의 압박, 국제사회의 냉대와 소외에 휘말려   절망과 울분에 스러져 갔던 그들의 절규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그들의 애국심을 우리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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