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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지방보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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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보훈청) 우리고장 출신 4월의 나라사랑 인물
부서 선양교육팀

우리고장 출신 4월의 나라사랑 인물

독립협회 창설 송재 서재필 선생(1864.1.7.~1951.1.5.)

출생과 성장

  선생은 1864년 1월 7일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에서 당시 동복군(현재 보성군)의 군수였던 부친 서광언과 모친 서주 이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곧 충청남도 논산군 구자곡면 금곡리 본가로 보내져 성장하였다가 인근 대덕군에 살던 가까운 친척 서광하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7세경 서울로 보내져 양모 안동 김씨의 동생인 김성근의 집에서 과거 공부를 하였는데, 김성근의 집에서 수학하면서 초기 개화파의 핵심인물인 김옥균, 박영효를 알게 되었고, 그들로부터 개화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문과에 급제한 양반 관료(1882년 3월 별시 문과에 급제함)임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김옥균의 권유로 1883년 일본의 호산(戶山)육군학교에 유학하여 1년여 동안 근대식 군사교육과 지리학 등 신학문을 익히면서 개화와 개혁을 통한 부국강병을 이루겠다는 자신의 신념을 확고히 하였다.

갑신정변 실패, 그리고 미국 생활

  1884년 7월 일본 유학에서 귀국한 뒤 선생은 고종의 승낙을 받고 사관학교를 건립하려 하였으나 수구파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이에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와 함께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국의 군사개입으로 정변이 3일만에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당초 기대와 달리 일본정부가 조?일관계의 악영향을 우려하여 이들을 박해하자 1884년 4월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의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부모, 형, 아내는 음독자살하고, 동생 재창은 참형되었으며, 두 살 된 아들은 보살핌을 받지 못해 굶어죽었다.

  낮선 미국에 도착한 선생은 1년여 동안 주경야독하여 힘든 생활을 하다가 1893년 6월 컬럼비아대학교(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취득하였다. 이듬해 미국 철도우편사업의 창설자의 딸 암스트롱양과 결혼하여 미국에 귀화하였다. 조지워싱턴대학에서는 병리학 강의를 맡았으며 세균학 연구에 몰두하였다.1894년 7월에 본국에서 갑오경장 추진내각이 수립되어 갑신정변 때의 정변주동자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지고, 박영효가 1895년 미국을 방문하여 그의 귀국과 외부협판직의 담당을 요청하자 조국의 개화독립에 봉사하기 위하여 1895년 12월 26일 귀국하였다.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창설

  귀국 후 선생은 국민계몽운동의 시급함을 절감하고 입각을 거절한 다음 개화파의 도움을 받아 1896년 4월 7일에『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한문을 모르는 국민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국문전용, 국문 띄어쓰기, 쉬운 국어쓰기의 방법으로 발행된 독립신문은 국민의 독립사상 형성과 진보 뿐만 아니라,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의 효시가 되어 그 후의 한국 신문과 언론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선생은 국내 동지들과 함께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종래 중국을 사대하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국민의 성금을 모아 한국독립의 상징으로서 독립문을 세우고, 종래의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으로 고치고 독립협회의 집회장소와 사무실로 사용하였으며, 34회의 토론회를 개최하여 국민의 자주독립 사상과 자유민권 사상을 고취하였다. 1898년 3월 10일 서울 종로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시민궐기대회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의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절영도(絶影島) 조차(租借)를 결사 반대, 나아가 러시아인 재정고문과 군사교관, 그리고 한러은행의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선생의 이러한 활동은 국민의 독립사상과 민권사상을 크게 신장시켰으나 선생의 영향력을 꺼려한 수구파정부와 국제열강들은 결탁하여 1898년 5월 14일 선생일 다시 미국으로 추방하였다.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1919년 본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추방 후 개업했던 병원을 닫아 버리고 다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19년 3월 15일 「재미한인전체회의」에서 외교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필라델피아에 외교통신부를 설치하여 각국에 대한 한국독립의 선전활동을 전개하였고, 1919년 4월 14일에는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지지를 결의하고 국제연맹과 미국에 대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1919년 4월 25일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임시정부가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자 그 위원장을 맡아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5월 「한국친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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