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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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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 안동]2009년 1월의 독립운동가 백산 우재룡 선생
부서 보훈과

2009년 1월의 독립운동가 우재룡(禹在龍)선생님
◈의병항전과 독립군 투쟁의 가교◈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1907년 산남의진에서의 의병활동과 1915년 박상진의사와 광복회를 조직하여 의열투쟁을 추진하였고, 1916년 중국 길림에서 광복회지부를 조직하여 혁명기지 건설을 추진하다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16년간의 옥고를 치른 백산 우재룡선생의 공훈을 기리고자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84년 1월 3일 경상남도 창녕군에서 단양우씨(丹陽禹氏) 채희와 진주강씨(晋州姜氏)의 6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무인적 기질을 보였던 선생은 1902년 대한제국 군대 대구 진위대에 입대하여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기까지 5년간 근무했다. 당시, 대구 감옥에 수감된 산남의진의 정용기 의병장에게 큰 감화를 받아 민족운동에 뜻을 두었고, 이후 청송의 산남의진을 찾아가 의병전쟁에 참여하였다.
  선생은 연습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병사들을 훈련시켜 의진의 전투력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하였고 1908년 2월부터 7월까지 청송․영일 등 경북 일원에서 일본군과 20여 차례 전투를 벌이며 서울 진공작전을 추진하였으나 1908년 9월 14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내란죄로 종신유형 처분을 받았으나 합방특사로 풀려나게 된다.
  1915년 7월 15일(음) 선생은 박상진과 함께 대구에서 광복회 결성에 참여하여 비밀ㆍ폭동ㆍ암살ㆍ명령의 4대 행동강령을 두고 독립전쟁 실현을 위해 전국에 군대식으로 만든 광복회 지부와 연락기관 및 독립군 양성을 위한 사령부로서 길림광복회를 설치하고 군자금 모집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친일파 처단을 통해 친일세력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1919년 9월에는 군자금 7천여원을 임시정부에 전달하고 임시정부와 힘을 합쳐 1920년 1월 광복단결사대(조선독립군사령부) 조직에 착수 1920년 6월 주비단을 조직하여 활동 중 임시정부의 임시군사주비단 사건에 연루되어 1922년 4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1937년까지 무려 16년간의 긴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신국가건설에 동참해 민중의 발전과 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해 일제강점기 뜻을 같이 했던 독립운동가들을 모아 광복회를 재건하는등, 활동을 계속하다 1955년 3월 3일(음) 대구에서 서거하셨으며 1967년 현재의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어 계신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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