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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청소식

지(방)청소개

국가보훈부(국문) - 우리청소식(경북남부보훈지청) 상세보기 - 제목, 부서, 내용, 파일, URL 정보 제공
[경주]우리고장출신 독립운동가-주진수(朱鎭洙,朱鎭壽)
부서 보훈과

강원도 울진(蔚珍) 사람이다.
일찍이 울진군 원남면(遠南面)에 만흥(晩興)학교를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신교육을 시켰다. 1909년 봄 서울 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신민회(新民會) 간부인 양기탁·안태국(安泰國)·이동녕(李東寧) 등이 민주에 제2의 독립운동기지(基地)를 건설하고자 계획하게 되자, 그는 강원도 책임자로 임명되어 군자금 10만원을 마련하도록 배정을 받았다.
1910년 8월에는 김 구(金九)·양기탁 등과 함께 서울에 총독부에 대립하는 도독부를 설치하였으며, 1911년에는 일제가 조작한 소위 사내(寺內)총독암살사건(일명: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유동열(柳東說)·윤치호(尹致昊)·양기탁·안태국·이동휘(李東輝) 등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간도 이민계획의 실현을 위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던 안명근(安明根)사건에도 관여하였다.
출옥후에는 가족을 이끌고 만주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의 추가가(鄒哥家)에 정착하여, 이시영(李始榮)·이상용(李相龍)·이동녕(李東寧)·김동삼(金東三) 등과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는 한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는 등 독립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1919년 9월에는 신참(新站)·황지강(黃地江) 등지에서 임시정부 특파원 전영화(田榮化)와 니콜리스크 정부로부터 파견되어 온 그와 황만영(黃萬榮) 그리고 신참지방의 윤인보(尹仁甫)·신상무(申相武)·안기완(安基完)·이 순(李舜) 등이 모여 미국차관 3백만불의 도입문제와 순회강연 계획 등을 논의하였으며, 그는 니콜리스크 정부의 미국인 고문의 말을 인용하여 "일본인을 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일본국을 적으로 할 것이며, 따라서 일본인을 살해하는 일은 안된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였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연단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1926년 4월에는 정의부(正義府)의 유일당(唯一黨) 촉성에 참여하기 위하여 이규풍(李圭豊)·최소수(崔素水)와 함께 소련에서 길림(吉林)으로 돌아왔으며, 정의부의 양기탁(梁起鐸)·현정경(玄正卿)·곽종대(郭鍾大)·오동진(吳東振)·고활신(高豁信), 천도교의 김봉국(金鳳國)·이동락(李東洛)과 형평사(衡平社)의 이동구(李東求)·송 헌(宋憲) 등이 모여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하였는데 그는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어 정의부의 행정기관으로서 당을 이끌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차이로 고려혁명당은 분열되었으며, 그는 다시 소련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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