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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서부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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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거사 실질적으로 이끈 항일투쟁 영웅
부서 보훈팀

《천민의 자식에서 재()러시아 독립운동의 대부로….일제 강점기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최재형(1860∼1920) 선생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다. 함경북도 경원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러시아로 이주해 재산을 크게 모은 뒤 항일 무장 운동을 이끌었다. 언론, 교육 사업을 통해 한인 사회의 개화를 주도한 계몽 운동가이기도 하다. 그는 안중근 의사의 후견인으로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도 직접 관여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2004년 9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그렇지만 최 선생은 아직 낯선 인물이다. 국내 학계에서 러시아 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미진했던 탓이다. 3·1절을 앞두고 그가 본격 재조명되고 있다. 역사소설가 이수광 씨는 최근 발간한 소설 ‘"대륙의 영혼 최재형"(랜덤하우스)에서 “최재형은 한국의 체 게바라”라고 평가했다. 박환(50) 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평전 "시베리아 한인 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역사공간)을 29일 출간할 예정이다. 》

의병단체 ‘동의회’ 총재-한인신문 사장으로 활약

러 주류사회 재력가… 털어 독립투쟁에 바쳐

박 교수는 “학자들이 재러 독립운동 연구서에서 일부 다룬 적 있으나 최 선생만을 다룬 단행본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최 선생이 어떤 인물인지, 왜 지금 그에 대한 조명이 집중되는지 박 교수에게서 들어봤다.

―최 선생은 어떤 인물인가.

“선생은 가난한 부모를 따라 어려서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다. 우연한 계기로 러시아 선원들과 인연을 맺었으며 그들로부터 러시아어와 서양 문물을 배웠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러시아 주류 사회에 파고들었고 관급 건설 공사, 군납 사업 등을 통해 큰돈을 벌었다. 어느 정도 재력을 쌓은 뒤에는 한인 사회의 지도자로서 재러 한인의 생활 안정과 교육사업에 앞장섰으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독립운동사에서 선생의 위상은 어떤가. 이수광 씨는 한국의 체 게바라로 평가했는데….

“선생은 1908년 헤이그 특사로 갔던 이위종을 비롯해 이범윤 김기룡 등과 "동의회"를 조직해 총재를 지내면서 의병부대의 무장 투쟁을 지원했다. 연해주의 한인 신문인 "대동공보"의 사장으로 항일 언론 활동을 주도했으며 1911년에는 한인의 자활과 역량 강화를 목표로 하는 "권업회"를 만들었다. 이 모든 활동에 재산을 아낌없이 바쳤다. 그가 독립운동의 거물이었다는 점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초대 재무총장으로 그를 지명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은 항일 운동의 현장인 연해주를 떠날 수 없다며 총장직을 고사했다.”

―안중근 의사와는 어떤 관계였나.

“선생이 동의회 총재로 있을 때 안 의사는 그곳에서 행동대장으로 활동했다. 안 의사가 거사를 벌이기 전 선생의 집에 머물며 사격 연습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거사의 실질적 배후였다고 학계에선 보고 있다.”

―선생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어땠나.

“선생이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자 상하이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모여 추모회를 열었다는 사실에서 당대의 평가를 알 수 있다. 영웅으로 추앙받던 인물이다.”

최 선생은 1920년 4월 항일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연해주 지역에서 대대적인 작전을 벌인 일본군에 검거돼 처형당했다. 그는 러시아 국적을 갖고 있어 화를 피할 수도 있었으나 주변 사람들에게 미칠 피해를 우려해 피신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1920년 5월 15일자 "독립신문"은 장문의 추모 기사를 실었다.

"최재형 선생은 용의과감()의 인()이며, 기()를 희생하야 동족을 구제하랴는 애국적 의협적 열혈이 충일하는 인격자요, 겸하야 성()으로써 인()과 사()를 접하야 민중의 신뢰와 존경을 박()하던 이라."

―그동안 왜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나.

“1990년 한국-러시아 수교가 이뤄진 후에야 학자들이 현지를 방문해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1930년대 후반 연해주의 한인들이 구소련 정부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면서 연해주 한인 역사의 맥이 끊겼다는 점이다. 선생뿐 아니라 재러 독립운동 전반에 대한 연구에 어려움을 겪었다. 재러 독립운동은 아직도 연구해야 할 게 많다.

―왜 지금 주목받는가.

“선생에 대한 책이 연이어 나오는 것은 우연의 일치다. 하지만 그동안 학계에서 해 왔던 선생에 대한 논의가 무르익은 데 따른 결과라고 본다. 늦었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선생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그는 해외 문물을 다른 이들보다 먼저 익힌 뒤 재외 한인동포들에게 실력 양성을 강조했다. 일찍이 세계화를 체험하고 이에 대처하는 방식을 실천했다고 할 수 있다. 또 조국 독립과 한인 사회의 발전을 위해 재산을 내놓았고, 직접 독립운동에 투신하기까지 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어떤 것인지 보여 준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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