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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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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북부)56년만에 6.25전사 부친 위패를 찾은 불효자를 용서하세요
부서 보훈과
56년 만에야 6·25전사 부친 위패를 찾은 불효자를 용서하세요 북부보훈지청 이동보훈팀 박미자 여느 주일의 목요일과 다름없이 나는 무거운 서류가방을 둘러매고 이 날의 근무지인 노원구 보훈회관으로 향했다. 나는 ‘오늘은 어떤 민원을 해결해 드릴까?’하는 설레는 마음으로 보훈회관 사무실에 도착해 분주히 보훈가족을 맞을 준비를 했다. 준비를 마치고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무엇이 그리 급하신지 노원구전몰군경유족지회장님께서 총총걸음으로 다가오셔서는 나에게 ‘미션’을 내려주셨다. 어떤 보훈가족의 6·25때 전사하신 부친 위패 찾기!! 위패찾기를 의뢰하신 분은 노원구 상계동에 거주하는 전몰군경 유자녀이신 “ 신 용”씨로, 7살인 1950년 6·25전쟁에서 아버님이 전사하시고 서조모 슬하에서 부모님의 제대로 된 정 한번 맛보지도 못한 채 고된 인생을 살아오신 분이었다. 생계걱정이외에는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던 그는, 이제야라도 아버지의 유골(혹은 위패)을 꼭 찾아서 그동안 마음에서 꽁꽁 얼어있던 한을 풀고 아버지께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용서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정을 전해들은 나는 바로 ‘미션 해결’에 착수했다. 보훈가족의 그 애타는 마음을 생각하면 조금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신 용’씨의 부친이신 ‘姑신영규’(1950.12.23사망)씨의 군별, 전시일자, 계급 등을 확인하니 현충원에 유골 또는 위패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수차례의 문의전화를 하고 사전에 위패 찾기 협조를 구한 후 ‘신 용’씨의 가족과 노원구전몰군경유족지회장님 및 회원들과 함께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국립서울현충원 민원안내실에서 위패를 찾는 시간 내내 ‘신 용’씨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혹시나 없으면 어쩌나... 만약 찾는다면 어떻게 아버님을 대할 것인가?’ 걱정, 긴장감, 죄스러움 등의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이 표정으로 역력히 들어났다. 나 또한 맘속으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못 찾는다면... 과연 어떻게 그 마음을 위로할 수 있단 말인가?’ 위패명단대장을 살펴보는 내 눈은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1시간여가 흐른 것 같다. 대장 속 수많은 이름 중 내 눈을 가득 채우는 글자가 있었으니 ‘신영규’ 세 글자였다. 기쁜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하고 군별, 전시일자 등의 나머지 사항도 일치하는지 살펴보았다. 바로 ‘신 용’씨의 부친이었다! 아버지의 위패를 확인한 순간 ‘신 용’씨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오열하였다. 63년 간 살아오면서 부모님 없는 슬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자식으로서의 죄스러움을 눈물과 탄식으로 쏟아내었다. 나를 비롯한 거기에 있던 분들 모두 마음으로 ‘신 용’씨를 위로하였으며 또한 진심으로 위패를 찾은 것에 기뻐하였다. ‘신 용’씨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그 동안 늘 꿈꾸던 자신의 뿌리를 찾게 된 것에 너무나 기뻐하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위패를 찾을 수 있게 도움을 준 북부보훈지청 이동보훈팀과 노원구 전몰군경유족회원 분들께 깊은 고마움을 표하셨다. 마음이 참 뿌듯했다. 일을 마무리 짓기까지 보훈가족인 ‘신 용’씨와 동행하며 행동과 마음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했다. 그러나 ‘신 용’씨와 같은 분들이 아직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 사실을 생각할 때 요번 이 하나의 일만을 가지고 언제까지고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 나라를 위해 이름도 빛도 없이 희생하시다 어디인지도 모를 곳에 외롭게 계실 부모님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오늘도 가슴을 부여잡고 동분서주 찾아다닐 유족을 생각하며, 나는 다른 ‘미션’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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