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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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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북부)경성천지를 뒤흔든 3시간 대격전
부서 보훈과
서울 종로구 동승동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엘 가면 ‘김상옥 열사’의 동상이 있고, 그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나라와 겨레가 왜적에 짓밟혀 비굴한 삶을 잇느니, 장렬한 의거로 죽음을 택한 대한인 김상옥 열사, 애국의 횃불이 여기 영원히 타고 있다. 적의 심장부에 폭탄을 던지고 떼 지은 왜경과 싸우고 또 싸우다 『아! 내조국이여』외쳐 부르고 최후의 일발로 자결 순절하신 거룩한 님의 의거 터에 그 모습을 새겨 세워 그 공을 기린다. 그리고 종로5가 효제초등학교 뒷길을 보혐 이정표에 「김상옥의 길」이 나온다. 서울시가 지난 5월 순국선열의 공훈을 선양하기 위한 조치로 명명(命名)을 한 것이다. 이 길은 김상옥의사(1890~1923)의 생가와 최후 격전 자결순국 현장으로 통하는 길이며, 김의사의 항일독립투쟁 요람이었던 곳이다. 김사옥 의사는 누구이시며 선열의 공훈은 어떤 것일까? 김상옥 의사는 1890년 당시(어의동이었던) 이곳 효제동 72번지에서 태어났고, 23세 되던 1913년부터 1923년 1월 22일 이곳 효제동에서 일제(日帝)군경과 대격전을 벌이고 마지막 1탄(彈)으로 자결, 순국할 때까지 대한광복단조직 가담(1913), 전남 보성군 조성헌병대 기습(1916)을 비롯하여 일경의 장검 탈취(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 총독부 폭파 및 시가전 추진, 일경의 예비검속에 동지들이 피검 실패(1920년 8월), 중국 상해 망명(1920년 10월), 총독부 폭파를 앞두고 폭탄 실험을 겸한 종로경찰서 폭파(1923년 1월 12일) 후 후암동과 효제동에서 유례없는 항일시가전을 전개했다. 특히, 1923년 1월 김상옥 의사가 결행한 세 차례의 항일 서울시가대격전은 임시정부 수뇌부와 협의 하에 총독주살-총독부 및 조선은행 폭파를 위한 의거에서 비롯된 것으로, 독립운동 탄압의 총본산이었던 종로경찰서 폭파(1월 12일)와 후암동 격전(1월 17일), 효제동 대격전(1월 22일) 등 5일 간격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효제동 대격전은 김상옥 의사가 일제 군경 1천여 명의 4중 포위아래 양손에 권총을 들고 민가 5채를 신출귀몰하듯 넘나들면서 3시간의 총격전을 감행, 왜적 16여명 이상을 처단하고 마지막 1탄으로 자결 순국한 일기당천(一騎堂千)의 전투였다. 가족들이 김의사의 시신을 수습할 때 그의 몸에는 열 한 곳에 총상이 있었다. 의사(義士)의 대격전은 당시 일제가 3·1운동 진압을 세계에 선전하던 시기적 특성과 일제탄압하의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벌인 시가전이었다는 장소적 특성으로 볼 때, 독립군의 부대단위 작전 승리에 못지 않은 쾌거였던 것이다. 한편, 김상옥 의사는 무장투쟁뿐만 아니라, 일화배척(日貨排斥)을 목적으로 국산품 생산보급 등 물산장려운동(1917년), 혁신단 조직, 지하신문 혁신공보 발행을 통한 독립사상 고취 중 종로서에 피검, 가족까지 고문피해(1919년),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활동(1912년) 등으로 독립유공자 가운데서도 가장 여러 가지의 운동 방략을 실천한 분이다. 김상옥 의사의 의거활동은 당시 동아·조선일보(1923년 1월 12,14,17, 18,22,23일자) 그리고 3월 15~16일자 동아·조선일보에는 김상옥의사의 추도대회 기사가 실려 국민들에게 그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정부는 지난 62년 김상옥 의사(義士)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학계에서는 “김상옥 의사(義士)의 의열투쟁은 항일민족운동사에서 가장 큰 빛을 발하고 있으며 이로부터의 항일민족운동은 직접 투쟁만이 조국광복의 첩경임을 행동으로 보여준 의거였음에 틀림없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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