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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동부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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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보훈지청) 우리고장 출신 6.25전쟁 호국인물 김재호 일병(전남 광양 출신)
부서 선양팀

 

우리고장 출신 6.25전쟁 호국인물 김재호 일병


생몰연대 : 1925. ~ 1953. 7. 15.

출신지역 : 전남 광양

최종계급 : 육군 일병

상훈내용 : 을지무공훈장

참고문헌 : 한국의 전쟁영웅들

 

1. 생애(1925∼1953)

   1925년 전라남도 광양에서 출생한 김재호(金在鎬) 육군 일등병은 육군에 입대하여 수도사단 제26연대 1대대 3중대 1소대 1분대 소총수로 복무하였다. 그는 수도고지전투에 참여해 임무를 수행하고 많은 전과를 수립한 후 1953년 7월 15일 전사하였다. 그는 국방부 일반명령 제20호에 의거 1953년 1월 13일 을지무공훈장이 추서되었으며, 그의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 공적

   휴전회담이 개최된 지 1년이 지나도록 포로송환 문제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좌초된 상태에서 적은 아군 정면에 강력한 국지공격을 감행하여 회담을 유리한 방면으로 타개하고자 하였다.
   이 무렵 금성천 부근의 국군 제2군단은 1952년 4월 5일 화천에서 재창설된 다음 미 제9군단으로부터 금성-북한강 동안까지의 전선을 인수하고 제6, 수도, 제3사단을 배속 받아 이곳 중동부 전선을 방어하고 있었다.
   당시 군단의 주저항선은 금성 남쪽 3㎞ 봉화산-교암산-663고지-북한강 동안 어운리-949고지-973고지-통선골로서 이미 1951년 추계공세때 주로 국군이 제한공세작전에서 확보한 선이었다.
   이때 군단의 방어중점은 금성의 통제를 최우선으로, 주저항선의 주요 고지군을 확보하여 17번 도로, 103번 도로, 그리고 949고지에서 북한강으로 이르는 적의 접근로를 봉쇄함은 물론 주저항선 전방에서 적의 공격을 격퇴, 현 전선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군단과 대치중인 적은 중공군 제12군과 제68군 일부로 판단되었다. 제12군은 제67군과 교대한 군으로서 제31사단을 국군 제6사단 전방의 금성 북쪽에, 제35사단을 수도사단 전방의 율사리(672고지)-747고지-좌수동(748고지)에 배치하고 제34사단을 창도로에 예비로 보유하고 있었다. 제68군은 제12군과 연하여 북한강 동안 어운리에서 문동리 간 전선을 담당하였으며, 그 예하의 제203사단이 국군 제3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치 국면에서도 국군 제2군단이 이곳의 방어임무에 투입된 이래 쌍방이 주로 진지강화와 정찰활동에 주력함으로써 전선은 소강상태를 유지해왔으나 국군 제2군단장이 6월 10일에 각 사단으로 하여금 적정탐지와 적진파괴 및 교란을 목적으로 한 제한목표공격을 실시하도록 명령함으로써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주로 전초진지 쟁탈전이 재연되었다.
   이 작전에는 1개 대대규모를 초과하지 않는 부대를 운용하도록 하였다. '백-숏(Back Short)작전'이라 불렸던 이 선제공격작전에 적의 하계 및 추계공세가 이어짐으로써 1952년 후반에는 군단 전역에서 전초진지 전투가 전개되었다.
   그 중에서도 수도사단 전초인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 제3사단의 949고지 북쪽 전초 독수리고지(572고지) 및 피의 고지(748고지), 그리고 제6사단 정면이며 금성 동쪽 2㎞ 지점의 A고지와 B고지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9월에 접어들며 적은 아군에게 그들의 휴전조건에 승복하도록 강요하는 동시에 작전에 유리한 전초진지를 확보할 목적으로 전 전선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취했는데, 그 신호탄이 된 대표적인 전투의 하나가 바로 수도고지전투였다.
   표고가 600m 내외인 수도고지는 지도상에 정확히 표고조차 기록되지 않는 무명고지로서 663고지에 매달린 작은 혹과 같은 봉우리로서 좌수동 계곡을 감제하는 기능이 있어 촉각과 같은 관측상의 요충점으로 부각된 작은 고지일 뿐 전략상으로는 쌍방에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화천 북방의 파로호에서 계속 북방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민통선 내에 북한강과 금성천의 합류지점이 있는데, 그곳의 북쪽에 위치한 무명고지가 바로 수도고지이다.
송요찬(宋堯讚) 준장의 수도사단은 1952년 3월에 지리산지구 공비토벌작전에서 맹위를 떨치고 금성 동쪽, 북한강 서안의 중부전선으로 진출하여 제2군단의 중앙이 된 뒤로 당면의 중공 제12군 35사단과 수도고지 일원에서 1952년 7월 7일부터 8일까지 제1차 전투를, 1952년 8월 5일부터 7일까지 제2차 전투를 치른 후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사단의 우일선으로 663고지와 수도고지 방어책임을 부여받은 제26연대는 주력을 미조리(Missouri)선에 배치하고 지휘소는 등대리 서남쪽 2.5㎞ 금성천 남안에 위치한 소성리에 소재하고 있었다.
그 당시 피·아의 전선이 그간의 교착상태를 틈타 강화된 시점으로 전면공세는 그만큼 위험부담이 수반되었다. 따라서 서로가 전략적인 차원에서의 전환점이 없는 한 신중을 기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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