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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방보훈청

지(방)청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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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 신한청년단 결성(1918.11.28)
부서 선양계
신한청년단(신한청년당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앞둔 1918년에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 운동 투사들은 30대의 소장층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로서 해외 독립운동단체 중 가장 오래 된 단체이다. 대한독립, 사회개조, 세계대동을 강령으로 한 이 단체의 핵심 인물은 김규식, 선우혁, 문일평, 신규식, 신채호, 여운형, 장덕수, 김철, 서병호 등이었다. 여운형은 1918년 11월에 윌슨 미국 대통령의 특사로서 상하이에 왔던크레인(Charles Crane)을 만나 파리에서 개최될 강화 회의에 민족 대표의 파견을 제의하였다. 그는 장덕수, 조동호 등과 협의하여 파리 강화 회의와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 청원서를 보내기로 결정하고, 영문으로 두 통을 작성하였다. 이 독립 청원서는 신한 청년당 대표 여운형의 명의로 보내졌는데, 한 통은 크레인에게 주어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전하게 하였고, 또 한 통은 한국 대표가 파리에 못 가게 될 경우에 대신 전해 달라고 '밀라드 리뷰(Millad Review)'지의 사장에게 맡겼다. 그 후,신한 청년당은 파리 강화 회의에 민족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김규식을 선정하여 1919년 1월 말에 파리로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여운형과 장덕수를 각각 러시아와 일본에, 선우혁과 서병호 등을 국내에 파견하여 긴밀한 연락체계를 구축했다. 그리고 김규식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당원들을 각 지역으로 보내 파리 대표의 활동 자금을 모으고, 이를 후원하기 위한 국내외의 독립 운동 전개를 촉구 하였으며, 기관지 《신한청년보(新韓靑年報)》를 발행하여 해외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등 신한청년단의 이러한 노력들은 국내의 민족 지도자들이 독립 운동을 준비하는 데 영향을 주어 3.1 운동의 진원이 되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상하이로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독립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신한청년당의 핵심 당원들은 1919년 4월 초에 프랑스조계 안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했는데, 이것은 뒤이어 4월 19일에 결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모체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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