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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동부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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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햇빛 못본 정근 독립투사의 삶
부서 보훈과
기독교계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우리 고장 애국지사가 유림의 독립운동에도 깊숙히 관여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이 인물에 대한 재조명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巴里長書)비 건립추진위원회가 발간한 파리장서 약사에 따르면 호남지역의 몇 안되는 서명 인물이 바로 독립운동가 청남(靑南) 정근(鄭根.1882-1938)선생이다. 정선생은 그동안 기독교계 독립운동가나 계몽운동가로 알려져온 인물이다. 그러나 유림의 독립운동인 파리장서에 서명한 인물임이 밝혀지면서 선생의 기독교와 유교를 넘나드는 독립운동은 가히 초 종파적이라는 평가를 듣게 됐다.
기미독립운동유족회 곽 목 회장도 "정근 선생은 분명히 유림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 3.1선언서만 하더라도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대표들이 발표한 것인데 유림을 대표한 파리장서가 발표됨으로써 3.1운동이 민족지성을 총괄한 의미를 갖게됐다"고 의미를 새겼다.
후손들은 정선생이 독립운동 당시 상해와 신의주, 삼례를 오가며 전라도의 연락책 및 자금조달을 맡았지만 일경의 감시를 피해 활동하던중 신의주에서 체포돼 신의주형무소 대전형무소 등에서 복역 중 얻은 병고로 사망했다고 전한다.
후손들과 기독교계에 따르면 정근 선생은 전북 삼례에 최초로 사립 영신(永信)학교(뒤에 永興학교)를 세웠다. 27년 조선총독부로부터 학교 폐쇄령이 내려지자 서울 총독부로 달려가 엄중 항의할만큼 계몽운동에 열을 쏟았다고 전해진다. 영신학원은 뒤에 사립 국민학교로 승격, 50회의 졸업생을 내고 68년부터 공립으로 바뀌었다. 청남은 또 삼례제일교회를 세워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와함께 청남은 전주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설립에도 깊숙히 참여했고 이 학교 교편을 잡기도 했다. 그만큼 기독교를 믿음으로한 독립운동과 애국계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정선생은 무엇보다 행적을 감추기 위해 본적을 밝히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독립운동가들이 할 수 있는 당연하고도 마땅한 신변보호책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에 와서는 활동상황을 밝히거나 유공자 선정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 독립운동가 정근선생  
청남의 이같은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에 대해 제대로된 평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후손들이다. 완주군 삼례읍에 사는 손자 정은씨(62)와 부인 권오영씨(55)부부의 끈질긴 노력은 그나마 아버지 소남(小南) 정병은(鄭炳恩)을 역사의 골방에서 발굴해내는데 만족해야 했다. 이들 부부는 지난 2005년 국가보훈처에 정 선생과 그의 아들 정병은을 국가 유공자로 신청했지만 보훈처는 정병은 선생만 독립 유공자로 인정했다. 정근 선생에 대한 입증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손자 부부의 바람은 조급하지 않았다.
"확보된 자료를 끈질기게 연구하다보면 유공자 인정은 자연스럽게 이뤄질 것입니다. 종교를 넘나들어 독립운동에 골몰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새삼 우러러집니다."
 
**파리장서 사건이란?
전국의 유림대표 137명이 1463자에 이르는 장문의 "독립청원서"에 서명한 뒤, 세계 평화회의가 열리는 파리에 보내 공표케 함으로써 일제의 죄상을 만천하에 알리고 한국의 존재를 각인시킨 일대 사건이다. 1919년 유림들이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보낸사건이다. 3.1운동에 견주어 결코 뒤지지 않은 대사건임에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애석한 역사의 한 대목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유림은 일대 수난을 당하게 된다.
                                                         
- 새전북신문 8월 15일자 기사 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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