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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방보훈청

지(방)청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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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철영 애국지사 생신 축하
부서 총무과
서울지방보훈청(청장 이봉춘)에서는 8월 14일 생신을 맞이하신 이철영 지사님 댁을 방문하여 생신 축하 케잌과 꽃다발 그리고 감사의 뜻을 담은 작은 선물을 전달하였다.
  국가보훈처에서는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던 암울한 시기에 조국독립이란 일념으로 신명을 받치신 지사님들의 고귀한 희생에 감사하고 이분들의나라사랑 정신을 이어받기 위하여 애국지사님의 생신일에는 간부 직원들이 직접 방문하여 감사의 뜻을 전하는 행사를 전개하고 있다.
  이번에 생신을 맞으신 이철영 지사님은 함남 북청(北靑) 사람이다. 1943년에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1944년 1월에 일본군 평양사단내 47포병부대에 강제입대 당하였다.
  이무렵 일제는 전쟁에 광분하여 소위『조선인학도 육군특별
지원병제도』란 명목으로 조선인 학생들을 그들의 전선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학병지원은 어디까지나 표면상 지원이었지 실제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일군 평양사단은 42·43·44 보병부대 및 47포병부대와 48공병부대, 50치중병부대 등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들 부대에 각기 배속되었던 학병들은 동년 7월에 초년 훈련병의 과정을 마치고 어느 정도 병영생활에 익숙하게 되자 42부대를 중심으로 학병항쟁을 계획하였다. 이때 47포병부대 소속으로 학병 항쟁에 참가한 그는 42부대의 학병동지들과 모의를 갖고 동년 8월부터는 동지를 포섭하는 등 의거준비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평양사단내 각부대의 학병들은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하였는데 그는 학병조직의 제2지대를 지휘하였다.
  학병항쟁의 계획으로는 평양사단 병영의 폭파 등이 제의되었으나, 폭약과 탄약의 입수가 어려웠으므로 일단 부대탈출 후 한만국경지대와 부전고원 등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때를 기다려 평양사단을 폭파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1944년 10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를 진행했는데 날짜가 임박해지면서 각 부대간의 연락이 제대로 되지않아 부득이 거사일을 한달 뒤인 11월 1일로 연기하였다.
  그러던 중 학병의거를 탐지한 한인 헌병보조원이 그 사실을 일본군 헌병대에 밀고하였고, 또 학병동지인 김완룡(金完龍)이 일본군 상관을 구타한 일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평양사단의 학병항쟁계획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써 그도 일군 헌병대에 피체되었고, 그후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군법회의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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