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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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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우리고장 출신 독립운동가-박동활(朴東活)
부서 보훈과

경상북도 영덕(盈德)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의 영해읍(寧海邑)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知品面洛坪洞)교회 조사(助事)로서 유학(留學)차 평양(平壤)으로 가다가,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평양행을 단념하고 즉시 귀향한 김세영(金世榮)과 구세군 참위(救世軍參尉) 권태원(權泰源) 등에 의해 계획되었다. 이들은 3월 18일의 영해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군내의 영해면·병곡면(炳谷面)·축산면(丑山面)·창수면(蒼水面)의 기독교도와 농민층을 광범위하게 규합하면서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마쳤다.
한편 이같은 거사계획을 전해들은 그는 이에 적극 찬성하여 3월 18일 오후 1시경, 남효직(南孝直)·남여명(南汝明)·정규하(丁奎河) 등 3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성내동(城內洞)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전개한 후, 경찰주재소로 달려가서, 일본 경찰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위협하여 그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그가 장터로 돌아가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다시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갔을 때, 주임순사 영목학차랑(鈴木鶴次郞)이 거만한 태도로 해산을 명령하며 태극기를 뺏으려 하였다.
그러자 그는 분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곤봉과 돌멩이로 주재소를 때려부수고 순사부장을 넘어뜨린 후, 2명의 일본 순사의 모자와 칼을 빼앗았다. 그후 공립보통학교로 시위행진하여 평소 일제의 정책을 찬양하던 이곳 교사들을 규탄하고 건물을 파괴한 후, 일본인 소학교·우편소·면사무소를 차례로 파괴하고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주재소에 도착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찬송가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주재소 안에 걸려 있던 경찰복을 모두 찢어버렸으며, 비치되어 있던 장총 4정과 87발의 실탄을 빼앗아 파기하였다.
이때 주재소의 응원 요청을 받고 영덕경찰서에서 서장 무의손(茂義孫)과 4명의 경찰이 긴급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다가,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려 철수하였는데, 그는 격분한 시위군중과 함께 그들을 추적 포위하여 총과 칼을 빼앗고, 제복을 찢은 후 곤봉세례를 가하여 일본인이 경영하는 수본(水本)여관에 감금하였다. 이곳의 만세시위는 이날 밤과 이튿날까지 계속되어, 오전 11시경 포항(浦項)헌병대에서 출동한 일본 헌병분대장과 6명의 헌병이 이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그들도 이 엄청난 군중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후 5시경, 대구(大邱)에 있는 일본군 보병 80연대로부터 장교 이하 17명이 출동, 헌병들과 합세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써,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강제 해산시켰다. 그후 일제는 대대적인 검속을 펼쳤는데,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공무집행 방해·건조물 손괴·기물 손괴·공문서 훼기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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