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청소식

지(방)청소개

국가보훈부(국문) - 우리청소식(경북남부보훈지청) 상세보기 - 제목, 부서, 내용, 파일, URL 정보 제공
[경주]10월의 독립운동가 권득수(權得洙)선생
부서 보훈과
◈ 북한강을 누빈 양평 의병장 ◈
  국가보훈처(처장 김정복)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대일항전에 앞장선 양평 의병장 권득수 선생(1877.10.4~1907.9.2)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발표하였다.
 선생은 1873년(고종 10년) 경기도 양주군 남면에서 출생한 뒤, 파주군 적성에서 성장하였다. 본관은 안동이며, 자를 성근(成根)이라 하였다. 선생의 부친인 권신영(權信榮)은 정3품 절충위장(折衝衛將)을 지낸 무관 출신이었으며, 선생은 어려서부터 엄격한 충효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가학(家學)을 전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학자 김정화(金正和)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충군애국 사상을 배양해 갔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1907년 대한제국군이 해산되자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일으켜 보겠다는 굳은 의지로 약관의 젊은 나이로 경기도 지평(砥平), 이천(利川) 등지에서 의병 60여 명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창의 후 선생은 양평의 용문산을 근거지로 삼고 양평을 비롯해 양주, 이천, 지평 등지를 전전하며 도처에서 일제 군경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용문사(龍門寺)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해 놓고 활동하던 선생은 대세를 타고 휘하 의병을 이끌고 한강 이북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으며 선생의 도강을 차단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 기병대와 치열한 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또한 양주(楊州) 회촌(檜村)에 거주하고 있는 신재만(申載萬)에게 국가를 위하여 창의할 것을 권유하고 자금 5만원과 양총(洋銃) 및 조총(鳥銃) 등 13정을 모집하였다.
 1907년 양주(楊州)·양근(楊根)·이천(利川)·지평(砥平) 등지에서 의병 200여명을 모집하여 활동하다가 선생은 일본군 보병 제52연대 9중대와 수차에 걸쳐 접전을 벌이던 중 용문사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하였으며 이 때 선생의 나이 31세로 올해는 순국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파일
U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