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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동부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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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우리지역의 독립운동가 소개 - 경재 김인전 선생
부서 보훈과
◎ 경재 김인전 선생(1876.10.7-1923.5.12)
   - 1919 3·1독립운동 전북지방 주도
   - 1920 상해임시의정원 부의장, 정무조사 특별위원
   - 1922 제4대 임시의정원 의장, 한국노병회 조직    이사역임
   - 1980 독립장 서훈
   - 1963 건국훈장 독립장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출신이다
 191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선생은 전주 서문외(西門外) 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여 목회활동, 예수교 장로회 성경학교 교수·전북노회장(全北老會長) 등의 교직을 이용한 전도활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선생은 일제 식민통치의 압제에서 고통받는 우리 민족을 구원하는 일이 곧 없는 자, 못가진 자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임을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이 담임하던 전주 서문외 교회에는 신흥(新興)학교와 기전(紀全)여학교 등의 교사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선생의 영향 아래 암암리에 민족교육을 실시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비밀리에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였다. 그것이 선생의 지도 아래 기전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조직한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송죽형제회(松竹兄弟會)였다.
 1910년대 엄혹한 일제의 무단통치 아래에서도 이같이 선생이 북돋아온 민족 독립운동의 역량은 3·1운동을 통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3·1운동 기간 중 군산에서는 3월 5일부터 여러 차례 선생의 지도를 받았던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세시위를 벌였다. 전주에서도 3월 13일 선생의 지도 아래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의 학생 및 교사, 그리고 기독교신자들이 천도교측과 합세하여 군중들을 이끌고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항일 독립의지를 불태웠다. 때문에 선생은 전라도 지방 만세 시위운동의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일경의 표적이 되었다.
이에 선생은 국내의 3·1운동 진상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한편,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해외 망명을 결심하였다. 그리고 망명지는 중국 상해로 결정하였다. 그것은 상해가 국제도시인 까닭에 3·1운동의 진상을 전파하기에 적합하고, 또 여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되어 독립운동을 지휘 통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3·1운동 직후 선생은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성립되자 상해로 거처를 옮겨 임시정부의 소속원으로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1920년 2월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정원(議政院) 재무예산위원(財務豫算委員)으로 피선되자 임시의정원의 살림을 도맡아 하였다. 즉 의정원에서는 인구세(人口稅)의 징수, 국내외에서의 독립공채 발행, 구국(救國) 활동을 위한 재정단(財政團)을 조직하는 일을 맡았으나 예산과 결산만큼은 행정부에 전담하였다. 동년 4월에는 의정원 정무조사특별위원(政務調査特別委員)이 되어 군사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때부터 임시정부의 대외군사활동이 활발해지던 시기이므로 그는 장기적 독립전쟁을 위해 지구력과 규율을 확보하는 방법으로서 군사경험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군사회의의 개최와 군인학과의 개설, 사업부의 설치, 국민의용병 등을 모집하여 대오를 편성하게 하였다. 또한 군사교육의 실시와 독립전쟁을 하기 위한 지역 선정, 외국의 사관학교에 무관학생(武官學生)을 파견하고 군사선전대를 마련하는 등 직접적 전쟁에 대비키 위한 전열을 가다듬는 등 안건을 내세워 실천토록 하였다. 이렇듯 의정원의 안건설정, 임시정부의 시정방침 등 활발한 활동으로 1920년 4월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21년 5월 사임할 때까지 임시 의정원을 이끌었다.
  1920년 9월에는 임시정부와 태평양회의 연구회가 협의하여 국내외 각 방면에서의 활동을 분담하게 되었는데 그는 남한(南韓) 지역의 기독교와의 연락책임자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동년 11월 9일에는 상해 대한인 거류민단의 본구 의원에 당선되어 한진교(韓鎭敎) 서병호(徐丙浩) 이유필(李裕弼) 등과 함께 교민의 복지증진을 위해서 노력하였으며, 동년 11월에는 임시정부 재무부 비서국장 겸 임시공채관리국장(臨時公債管理局長)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921년 3월에는 대한예수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 서기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을 선언하였으며, 동년 5월에는 안창호(安昌浩) 등과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설립하여 한 중간의 유대강화에 기여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학무총장(學務總長) 대리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동년 8월에는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 서기로 임명되어 자금조달에 전념하였으며, 11월에는 의정원 의원 25명이 연서(連署)한 독립청원서를 태평양회의에 제출하였다.
  1922년 2월에는 임시의정원 전원위원장(全院委員長)에 선출되었으며, 동년 4월에는 제4대 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의정활동을 이끌었다. 동년 7월에는 독립운동자들의 단합을 위하여 안창호 김덕진(金德鎭) 최 일(崔日)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그 회원이 되었으며, 9월에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의 교육과 간사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2년 10월에는 김 구 조상섭(趙尙燮) 이유필(李裕弼) 여운형(呂運亨) 등과 한국노병회(勞兵會)를 발기하여 군대 양성과 독립전쟁의 비용 조달에 주력하였는데 그는 노병회 이사에 선임되었으며, 1923년 4월에는 경리부원으로 활동하였다. 노병회는 1932년 10월 해산할 때까지 무장 항일투쟁을 위한 간부양성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일생을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하여 헌신하던 그는 1923년 5월 과로로 순국하니, 임시정부의 모든 요인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슬픔을 같이하였으며, 상해 외국인묘지(B39)에 안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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