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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방보훈청

지(방)청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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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역사 속의 오늘 - 의열단 조직(1919.11.9)
부서 선양계
919년 민족의 역량을 발휘한 3·1운동이 일어난 뒤 , 해외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옮긴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할 수 있는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1919년 11월 9일 밤, 만주 지린성에 모인 독립지사들은 민족주의 노선(路線)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抗日秘密結社) 단체인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당시 만주와 중국 본토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들이 독립을 쟁취하기에는 지나치게 미온적이고 온건하다고 본 의열단은 직접적 투쟁방법인 암살과 파괴·테러라는 과격한 방법을 선택하였다. 창단 당시의 단원은 대체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이 중심이 되었다. 고문으로는 김대지(金大池)·황상규(黃尙圭), 단원으로는 김원봉(金元鳳), 윤세주(尹世胄), 이성우(李成宇)·곽경(郭敬), 강세우(姜世宇), 이종암(李鐘岩)등 13명이었으며 ‘공약 10조’와 뒤에 ‘5파괴’, ‘7가살(可殺)’이라는 행동목표를 독립운동의 지침으로 채택하였다. 초기 의열단의 의거활동으로는 밀양·진영폭탄반입사건,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조선총독부 폭탄투척의거, 상하이 황포탄 의거,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식산은행 폭탄투척 의거 등을 들 수 있다. 의열단의 경륜과 강령을 체계화한 신채호(申采浩)는 1923년 1월에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선언)에서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문화주의(文化主義)·외교론(外交論) ·준비론(準備論) 등의 입장을 비판하고 민중에 의한 직접혁명과 평등주의에 입각한 독립노선을 제시하였는데, 그는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폭력적 민중혁명(民衆革命)에 의한 일제의 타도라는 전술을 내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점차 사회주의 이론을 수용하기 시작한 의열단의 이같은 변화는 1928년 10월 조선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가 발표한 ‘창단 9주년기념 성명’에서 잘 나타는데, 이렇듯 의열단은 순수한 민족주의 노선에서 계급적 입장까지도 고려한 급진적 민족주의 내지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였으며, 1929년 12월 베이징[北京]에서는 ML파와 합동하여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 본격적인 급진좌파로 변신해갔다. 의열단은 창단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근거지를 지린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기고, 상하이[上海] 지방에서 단원들을 포섭하여 1924년경에는 약 70여 명의 단원을 이룰 수 있었다. 후일 한국민족운동사에 이름을 남긴 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 김창숙(金昌淑)·신채호 등이 실질상의 고문 역할을 했고, 장제스[蔣介石] 중화민국총통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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