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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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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마산] 제23회 경남보훈대상 수상자
부서 보훈과
그대들의 숭고한 정신이 있었기에…
장한 용사 나갑철씨 (마산시 월영동)
육군 부사관으로 월남 파병 당시 총상까지 입으며 혁혁한 공을 세운 나갑철(64·마산시 월영동)씨.
그는 지난 64년 육군 9사단 30연대에 편입근무 중 하사관으로 졸업, 이듬해 월남으로 파병을 갔다. 66년 당시 아주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인 월남 오작교 전투에서 허벅지 총상을 입고 적의 무전기와 자동소총을 획득하는 큰 공을 세워 인헌무공훈장을 받았다.
나씨는 제대를 한 이후 직장생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늘 자신의 애국심을 몸소 실천했다. 월남에서 부상을 입고 육군병원에서 치료 후 제대, 부산의 한 목재회사에 입사해 7년간 성실히 직장예비군 중대장을 맡으면서 당시 부산시 대공분실 실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퇴임 직후에는 마산으로 이사와 85년 마산 민간 기동순찰대를 창설해 야간방범 순찰대 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 87년에는 260여명의 인근 유공자들을 모아 친목계를 조직, 사비를 털어가며 국가유공자 상호간의 친목 도모와 단합을 강조하기도 했다.
나씨는 지난 2001년 상이군경회 마산시지회장을 맡은 이후, 마산역 공영 주차장 제한입찰 조례법안 마련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장한 유족 이수갑씨 (합천군 적중면)
이수갑(64·합천군 적중면)씨는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게 가족이 몰살당하는 큰 슬픔을 겪었다. 50년 7월 합천 쌍백 전투에서 경찰이던 부친 이준성씨가 전사하고 이후 경찰가족이라는 이유로 어머니를 비롯해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등이 전부 북한군에 의해 사살됐다. 이씨의 당시 나이는 9세. 피붙이 남동생과 함께 살아남은 이씨는 친척들 집을 전전하며 자라던 중 53년 동생마저 질병으로 세상을 뜨면서 고아가 돼 버렸다.
이씨는 이후 품팔이 등 온갖 허드렛일과 궂은 농사일을 하면서 어린 나이에 짊어지기 힘든 아픔과 역경 속에서 꿋꿋하게 자랐다. 18살 다소 젊은 나이에 결혼한 그는 2년 뒤 아내와 갓 태어난 어린 아들을 두고 군에 입대했다. 1년간 군복무 도중 어려운 가정 상황과 독자임을 감안, 의가사제대를 인정받게 됐고 그 뒤 본격적으로 농사에 뛰어들었다.
끝없이 근검절약하고 노력한 덕분인지 29살 젊은 나이에 마을이장을 6년간 맡으면서 남을 위한 봉사에 눈을 뜨게 됐다. 이씨는 지난 2002년 전몰군경유족회 합천군지회장으로 취임 후 5년 넘게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같은 슬픔을 겪은 수많은 회원들의 애환을 듣고 복지 향상에 노력해 왔다.

장한 미망인 김차선씨 (거창군 거창읍)
전상 후유증을 앓고 있던 남편을 간호하다 20여년 전 남편이 사망한 이후에도 시모를 극진히 간호하고, 부양해 온 김차선(70·거창군 거창읍)씨.
1938년 거창군에서 태어난 김씨는 1961년 국가유공자였던 고(故) 김상옥씨와 결혼해 전장에서 부상을 입어 후유증을 앓고 있던 상이 6급 남편을 간호하다 1984년 남편이 사망한 이후에도 남편을 대신해 집안 생계를 책임지며 5남매를 묵묵히 키웠다. 그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시어머니를 극진히 부양해 1995년 6월 거창군수로부터 효부상을 받기도 했다.
지역 미망인회 회원으로 각종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주도적인 행사 참여로 1996년 5월 대한민국전몰군경미망인회 경상남도지부거창군지회장의 책무를 맡았다.
그는 지금도 보훈가족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신념으로 회원들과 수시로 어려운 주민과 노인들을 도와주는 등 보훈문화 확산에도 기여하고 있다.
어려운 형편에도 김씨는 자녀를 올바른 사회인으로 성장시켜 이들에게 보훈가족으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생활할 수 있도록 강조했다.

장한 아내 천강이씨 (마산시 산호동)
5급 전상군경의 아내로서 어려운 역경을 극복하고, 단신 월남한 남편을 적극 내조하면서 2남1녀의 자녀들을 우리 사회의 훌륭한 역군으로 길러낸 천강이(72·마산시 산호동)씨.
천씨는 최북단 함경북도 성진에서 최남단 마산에 정착했으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실의에 빠진 전쟁고아 남편을 맞아 그와 함께 부림시장 노점에서 양말장사, 냉차 장사를 했으며, 가족을 위해 가정부 일과 식당 종업원 등 온갖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는 누구보다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도 남편이 사회적 냉대와 적응 능력 부족으로 자포자기할 때마다 사랑으로 감싸주며, 서로를 이끌어 1977년 마산시 중성동에서 내집을 마련하는 기쁨도 가졌다.
그녀는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자식들에게 항상 봉사하는 모습을 보여줘 자녀를 올바른 사회인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
장남은 마산 산호동에서 꽃집을 운영하고 있고, 장녀는 법제처 정책팀에서 간부직으로 근무하고 있다.
또 차남은 농림수산부 사무관으로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있다.

특별 보훈 안석기씨 (함안군 가야읍)
지난 23년간 무공수훈자회에 몸담고 국가유공자 장례단 운영 등 명예선양사업으로 국가유공자 위상제고에 힘써온 안석기(76·함안군 가야읍)씨.
안씨는 1951년 고교 졸업과 동시에 부모와 아내를 남겨둔 채 전쟁이 치열하던 그해 10월 수도사단 전차부대에 입대했다.
군생활 중 가장 치열했던 1954년 1월 10일의 빨치산 토벌작전과 낙동강 방어작전 및 다부동 전투에서 세운 공적으로 그해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전역 후 피폐해진 고향을 되살리기 위해 다양한 사회활동을 펼쳤다.
특히 국가유공자의 위상 제고와 사기 앙양을 위해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함안군 지회장을 10년간 역임하면서 탁월한 지도력으로 회원간의 친선과 화목을 도모했다.
고령화돼 가는 회원들을 위해 꼭 필요한 사업인 장례단을 구성해 마지막 가는 전우들의 위상과 그 가족들의 영예로운 삶을 위해 국가유공자의 선양행사에 헌신했다.
이 같은 아버지의 모습을 본받은 4남매도 공익사회, 정의사회를 위해 일하는 올바른 사회인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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